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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제4장 신해혁명과 민중 운동(하)

입력 | 2007-10-28 09:22:00

옛 베이징 대학(北京大学) 건물 옆에 세워진 5•4 운동 기념비= 베이징에서, 니시(西) 촬영


목소리 높이는 민중들의 연쇄

조선3·1독립 운동, 중국5·4운동 / 다이쇼(大正)데모크라시

◆ 제1차 세계대전과 민족자결

914년 7월부터 1918년 1월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약 30개국이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을 맞이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제안했다. 그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의 원칙이다. 각 민족의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전후 처리를 둘러싼 1919년 파리 강화 회의는 14개조의 원칙을 기본으로 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과 청도(青島)의 반환을 요구한 중국에서 기대감이 높았으나 비유럽 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 이집트, 인도 등에서는 민족 운동이 고조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 3•1 독립 운동

일본의 통치 하에 있던 조선 각지에서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데모 행진을 했다. 이로 인하여 만세 사건(운동)이라고도 불린다. 종교 지도자 등이 사전 준비를 하여, 서울, 평양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중심부인 탑골 공원(구 파고다 공원)에 모인 민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데모 행진을 시작하였다. 약 3개월 동안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주민을 예배당에 감금해 불을 지르는 등 약 30명을 학살한 제암리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일련의 운동을 둘러싸고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외에, 4만 6948명이 투옥되었다. (박은식 저 “조선 독립 운동의 혈사”). 조선에서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등의 원점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3월 1일과 중국에서의 5월 4일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1919년은 2개월 사이에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이라는 대규모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한국에서는 매년 기념식전이 열리고 대통령이 연설을 한다. 올해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잘못된 역사의 미화이며 정당화”라고 경고를 하면서 성의를 다할 것을 요구했다. 작년에는 기념식전에 결석을 하고 골프장에 있던 국무총리가 비판을 받아 사임하는 사건도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재작년 봄의 일이 기억에 새롭다. 상하이(上海)등지에서 반일 데모가 연이어 일어나, 5월 4일은 특히 일중 당국자가 긴장하였다고 한다. 데모에 사용된 “저제일화(抵制日貨)”(일본 제품 보이콧)라는 단어는 5•4 운동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일본의 이웃나라들에서는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일본은 어떠한가. 먼 옛날의 잊혀져 가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두 개의 대규모 민중 운동은 같은 해 2월 8일, 도쿄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도쿄 스이도바시(水道橋). 큰 길에서 들어간 일각에 재일본한국 YMCA의 건물이 있다. 정면 현관 우측에 높이 2미터 정도 되는 흰 비석이 서 있다. “조선 독립선언 1919. 2.8. 기념비”라 쓰여 있다. 이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YMCA역사 등으로 재현해 본다.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오후 2시, 강당은 약 600명의 조선인 유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계하는 경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이 날은 학우회 총회라는 구실로 모였다. 개회와 함께 계획대로 독립 대회로 바뀌었다. 단상에 독립선언문이 붙여졌고 대표자가 읽어 내려가자 장내는 박수와 환성으로 들끓었다. 제국주의 일본에 반기를 든 순간이었다――.

당시 간다(神田)에 있던 건물은 관동 대지진 때 불타버리고, 많은 관계 자료도 지진 재해로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기념비 외에 다른 것은”이라고 부관장 김홍명(金弘明) 씨에게 물었더니 9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낡은 금속제의 릴리프가 복도 벽에 걸려 있었다. 당시의 선언문을 찍은 것이었다. 기초자는 당시 와세다(早稲田)대학 학생으로, 문인으로서 이름을 남긴 이광수다. “3•1 독립 운동에서 읽은 문장에 비해, 꽤 전투적인 내용입니다.”라고 김 씨는 말했다. 마지막 구절에 “요구가 통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혈전을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래로 조선 민족은 일본으로의 동화를 강요당하여 학교에서도 일본어를 중점적으로 배웠다. 민족의 존엄을 해치는 지배에 대해, 물밑에서는 독립 운동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상하이(上海)에 망명한 독립 운동가 여운형은 당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도쿄의 유학생을 비롯해 각지와의 네트워크 만들기에 바빴다.

1919년 1월, 조선 왕조의 황제였던 고종이 사망하자,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대중의 분노에 박차를 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회의에서 발표한 “민족 자결”즉, 어느 민족도 타민족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도 뒷받침이 되었다.

3월 3일의 고종 장례식에 맞춰서 어떠한 형태로든 독립 운동을 일으키려는 모색이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들려 온 소식이 도쿄에서의 유학생 궐기 소식이었다. 유학생 중 한 명은 옷감에 적은 선언문을 모자 안에 숨기고 서울로 건너갔다. 그 문장은 3•1 독립선언문에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밖에도 도쿄 집회에 참가한 유학생의 일부는 조선으로 돌아가 독립 운동의 준비를 진행했다.

노인들의 휴식 장소로 알려진 서울의 탑골공원(구 파고다공원)은 3•1 독립 운동의 발상지다. 문을 나서면, 바로 오른쪽에 독립선언문을 새긴 거대한 비석이 있다. 마지막 부분에 주도자인‘민족 대표’라는 이름으로 33명의 이름들이 줄지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민중들 앞에서 선언문을 읽은 것은 학생으로, 그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가까운 요리점에서 선언문을 읽자마자 경찰에 투항했다. “선언에 쓰인 비폭력을 표현했다.”라는 등 몇 가지 설이 있다.

데모는 약 3개월 동안, 전 국토에서 1542회가 행해졌다. 인구의 약 1할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는 집회, 결사의 자유도, 조선인이 자유롭게 의사를 전할 수 있는 매체도 없었다. 한편,‘민족 대표’가 체포를 당한 와중에 독립 운동은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민족 운동사가 전공인 신용하(慎鏞廈) 이화여자대학 석좌 교수에게 물어 봤다.

“종교 단체와 학교 조직이 움직였습니다. 이 두 단체만은 총독부에 사전 연락 없이도 집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천도교, 크리스트교, 불교도, 학교 교원들이 사전에 선언문과 태극기를 각지에 배부했다. 선언문에 있는 ‘민족 대표’는 모두 종교 지도자였다. “한편, 많은 민중을 모을 수 있도록 지방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에 운동을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미리 의도된 네트워크와 우발적인 사람들의 연결이 상승효과를 낳은 것이었다. “해외의 민족 운동에의 영향도 컸습니다. 특히, 중국의 5•4 운동이 일어나는 외부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중국에 튄 불똥 / 궐기를 재촉하는 교수들

그 말대로 3•1 운동은 중국에 비화했다.

우선, 일본의 탄압을 피한 멤버들이 상하이(上海)에서, 현 한국 정부의 근간이 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상하이(上海)는 독립 운동의 거점의 하나가 된다. 여운형과 2•8 선언을 기초한 이광수도 참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 지식인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각지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애국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5•4 운동은 먼저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의 3•1 운동을 주목하고 있었던 이들은 공산당의 창설자라 불리는 교수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시오(陳獨秀), 학생회의 중심인물이었던 후스니엔(傅斯年) 등이다. 자신이 편집하는 잡지에서 적극적으로 3•1 운동을 다루었다. 자신들의 미디어를 갖지 못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잡지가 큰 역할을 해냈다.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에서는 교원과 학생들이 여러 잡지들을 발행하고 있었다. 천(陳)은 “조선인을 보아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호소했다.

베이징(北京) 중심부에 ’54대거리(五四大街)’라 불리는 큰 길이 있다. 옛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의 건물‘홍루(紅楼)’에는 베이징(北京) 신문화운동 기념관이 있어 5•4 운동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3•1 운동과 관련된 전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의 쑹청여우(宋成有) 교수(동북 아시아사 연구)는 “대학 역사관에도 없습니다. 역사가 넓은 시점에서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5•4 운동을 중국사의 관점만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3•1운동과 5•4운동은 틀림없이 사상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공통의 적은 일본이었지만, 단순한 반일이 아닙니다. 민중에 의한 반제국주의 애국, 민주 운동으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어떠했는가.

일본에서는 쌀 소동, 보통선거 운동도

일본도 민중 운동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3•1운동과 5•4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 쌀값 상승을 계기로 도야마현(富山県)의 여성들이 항의데모를 한 이른바‘쌀 소동’이 발생했다. 이는 전국으로 번져 탄광 등지에서는 폭동으로 커졌다. 이로 인해, 초대 조선 총독이기도 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내각이 사직하게 된다. 또한 보통선거 운동도 활발해졌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뒷날 불렸던 시대였다.

안에서는 데모크라시, 밖에는 제국주의. 이것이 당시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일본 안에서, 3•1운동과 5•4 운동에 대해 이해를 표한 지식인도 있었다. 그 대표 격이,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다. 도쿄 대학(東大) 교수였던 요시노(吉野)는 크리스트교도로, 학교 내 YMCA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인과 조선인 유학생들과의 접촉이 있었고, 그 중에는 학비를 보태주었던 학생도 있었다.

3•1 독립 운동 직후에는 “일본 국민의 어느 부분에서도 ‘자기반성’이 없다.

어느 정도 자신들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첫 과제는 자기반성이 아니면 안 된다”(“중앙공론(中央公論)”). 5•4 운동에 대해서는 “일본을 배척하는 것은 실은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은 침략의 일본과 평화의 일본 두 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동방 시론(東方時論)”)라고 호소하고 있다.

5•4 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다자오(李大釗)는 요시노(吉野)가 중국 톈진(天津)의 북양 법정(北洋法政) 전문학교의 교단에서 가르칠 때의 제자다. 서로 편집에 관계한 잡지를 주고받는 등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다. 5•4 운동의 이듬해에는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의 교수이기도 한 리(李)를 통해,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의 학생단을 일본에 초대했다. 3•1 운동의 지도자인 여운형과도 도쿄에서 의견 교환을 하고 “존경할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도쿄 외국어대학(東京外国語大学)의 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준 교수는 최근 몇 년 동안, 근현대사에서의 동아시아와 일본의 관계성을 논해 왔다. 학생은 일본인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도 있다. “제각기 자신의 나라의 입장에서 밖에 역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연관 관계와 관련시켜 보면 역사가 달리 보인다는 말들을 매년 듣습니다. 요시노(吉野)에 대해서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또는 보통선거 운동을 한 인물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3•1운동과 5•4에 관심을 가지면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본인 학생들은 놀라고 있습니다.”

도쿄(東京)에서도, 서울에서도, 베이징(北京)에서도, 역사는 기념비와 기념관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인들은 3•1 운동이 제 발 밑인 도쿄(東京)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알고 있을까. 중국인은 5•4 운동에 영향을 준 조선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한 나라의 역사라는 벽을 넘었을 때에, 사람과 사상을 잇는 네트워크의 존재등 더 중요한 일들이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니시 마사유키 西 正之)

◆ 여운형(1886~1947)

조선의 독립 운동가. 중국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가했다. 일본의 패전 후, “조선 인민 공화국”건국을 주도하지만 1947년에 암살되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좌파라는 낙인이 찍혀 왔으나,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역사 재검토 정책에 의해 서훈되는 등, 근년 재평가되고 있다.

◆ 리 다이쇼(李大釗)(1889~1927)

중국 공산당 창설 멤버 중의 한 명.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에서 공부했다. 신문화 운동을 지도하고, 잡지 “신 청년” “매주 평론”을 편집했다. 북경 대학(北京大学) 도서관 주임 당시, 보조원으로 마오쩌둥(毛沢東)이 있었다. 1927년, 공산주의자 색출을 진행시키던 군벌 측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80년이 되는 올해, 북경의 옛 저택이 기념관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

미야기현(宮城県) 후루카와초((古川町)•현 오사키시(大崎市)) 출신.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위안 스카이(袁世凱) 장남의 가정교사로서 중국 톈진(天津)에 부임했다.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도쿄대학(東大) 교수 재직 당시 “민본주의”를 제창하여,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기수로 자리 잡는다. 노년에는 메이지 문화 연구에 힘썼다.

◆ 5•4 운동

1914년 7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영국의 동맹국 일본은 중국에 진출하고 있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국의 산동 반도(山東半島)의 근거지 청도(青島)를 공략했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1915년 1월, 산동(山東)에서의 독일 이권 양도와 남 만주(南満州)로의 권익 확대 등, 21개조의 요구를 들이대어 위안 스카이(袁世凱) 정부를 압박하고 요구를 관철시켰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은 산동(山東)의 반환 요구와 21개조의 요구 조건 철폐를 상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 대학(北京大学)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 등, 약 3천명이 5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항의 집회를 연 후, 데모를 일으켰다. 21개조 요구의 교섭을 담당했던 친일파 관료의 자택에 불을 지르는 등, 학생 3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더 큰 대규모 데모가 일어났으며, 상하이(上海), 하이난(武漢), 톈진(天津) 등에서는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노동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등, 전국 규모의 애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친일파 관료 3명을 파면시키고, 강화회의에 출석한 대표단에게 조약에 조인을 거부하도록 하였다. 반일, 항일뿐만이 아니라, 군벌 지배 등 봉건주의에 대한 반대와 사상 해방운동 등 폭넓은 요소를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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