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조선의 민중이고 어느 누구보다 우리의 고유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근대 서구 부르주아의 심장을 갖고 있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근대 서구적 이념과 사상으로 창조된 인물이란 분석이 나왔다. 최정운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반연간지 ‘한국사시민강좌’ 최신호 특집 ‘역사와 소설, 드라마’에 기고한 “조선시대의 민중세계를 다룬 소설 ‘임꺽정’의 공과 과”라는 글에서 “임꺽정은 조선 민중으로 위장된 근대 서구식 프티 부르주아”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먼저 벽초의 임꺽정이 단재 신채호에 의해 규정된 민중 개념을 친숙하게 형상화한 인물이지만 그 개념 자체가 근대적 저항민족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민중’이란 단어가 19세기 말부터 한중일에서 간헐적으로 사용되지만 ‘핍박하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저항과 혁명 그리고 폭력의 주체’로서 정립된 것은 1923년 발표된 단재의 ‘조선혁명선언’ 전후라는 것이다.
벽초는 작품 속에서 ‘민중’이란 말을 단 한 차례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기에 그의 민중 개념을 임꺽정 속에 자연스럽게 형상화했다는 분석이다.
벽초의 임꺽정이 이처럼 근대적 정치이념의 산물이다 보니 그가 표상하는 민중과 그 실체 간에 괴리가 발생한다. 임꺽정은 가난과 착취 속에서 신음하면서 저항정신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타고난 반항아였다. 임꺽정과 청석골 패거리들은 조선 민중을 대표하는 빈곤한 농민이 아니라 풍족한 안주로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신다.
저항의 화신이던 임꺽정은 소설 후반부로 가면 권위주의적으로 변해 양민을 학살하고 기생첩을 셋이나 두는 욕망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최 교수는 이러한 임꺽정의 풍모야말로 ‘인간이란 이성과 욕망이란 모순적 요소가 교차하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서구 부르주아 인간형의 반영이라고 분석한다. 끝까지 바른 길을 가려는 전통적 영웅상과 차별화되는, 질투하고 욕망하는 영웅상이라는 것.
근대적 영웅은 이성과 욕망의 분리를 통해 이런 갈등을 극복한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이성을 대신한 것이 민중적 증오였다는 점이다. 임꺽정에 내장된 민중적 증오와 부르주아적 욕망은 크게 이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이를 잘 알았던 벽초는 양자가 섞여서 희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반(反)지성주의를 심어놨는데 이것이 광복 이후까지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한국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최 교수의 분석이다.
완고하게 문자와 배움을 거부하는 임꺽정으로 상징되는 반지성주의가 결국 모든 권력을 적대시·죄악시하는 저항 민족주의적 민중주의를 그대로 유지시킴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현실을 마주 대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