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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간 그들… 너무 늦은 명예회복

입력 | 2007-01-24 02:58:00

억울했던 세월… 북받친 눈물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선고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고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 씨(오른쪽)가 23일 이 사건이 32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나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강병기 기자


1975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사형 판결을 받은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도예종, 여정남 씨.

23일 오전 10시 이들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공판이 열리기 30분 전부터 법정 제일 앞줄에 자리를 잡은 유족들은 무죄 선고를 예상한 듯 웃는 얼굴로 서로 악수와 눈인사를 건네며 밝은 표정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부는 유무죄와 형량을 선고하기에 앞서 판결 이유를 먼저 읽어나갔다. 당시 경찰과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여러 진술은 신빙성이 없어 증거능력이 없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때 재판장은 “(무죄가 선고되고) 재판이 끝난 뒤에는 조용히 나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족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무죄 선고를 확신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정도 예상된 판결=이번 판결은 2002년 12월 유족들이 청구한 재심을 2005년 12월 법원이 받아들인 지 약 1년 만에 나왔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이라고 발표했고,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인혁당 사건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힌 적이 있어 이날 무죄 선고는 어느 정도 예상됐다.

사법부는 이번 판결로 당시 국민으로부터 ‘사법 살인’이라는 지탄까지 받았던 오명을 씻어낼 수 있게 됐다.

▽간첩 조작사건 등 유사 재심청구 잇따를 듯=이번 판결로 과거 내란음모 및 간첩 조작사건 등과 관련된 재심청구 및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재심사건 변호를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이날 “무죄 선고를 받은 8명의 사형수 말고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20여 명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사법처리된 200여 명에 대해서도 1월 안에 재심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사형선고가 잘못됐다”고 밝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건 등 과거 사법부의 판결 오류가 드러난 사건의 재심청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 유가족 45명은 이미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34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놓았다.

▽유족들, 회한과 기쁨의 눈물 쏟아=32년간 자신들을 억눌러 왔던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사형수 8명의 유족들은 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진 데 대한 기쁨과 그동안의 억울함이 교차한 듯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쏟았다.

고 하재완 씨의 부인 이영교 씨는 “오늘 재판으로 억울함이 풀려 기쁘지만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눈을 감은 남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며 눈물을 흘렸다. 고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 씨도 “공산주의자의 아내로 32년을 억눌려 지내온 삶도 억울했지만 유족의 말을 외면한 국가가 더 원망스러웠다”며 “이제라도 진실이 가려져 다행”이라고 말했다.

또 고 송상진 씨의 부인 김진생 씨는 “진실을 밝히겠다는 생각을 단 하루도 하지 않은 적이 없다”며 “주위에서 모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손가락질할 때도 오늘 같은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확신했다”며 울먹였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