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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별]김정운 교수의 ‘젊은 날의 오아시스’ 이미숙

입력 | 2007-01-06 03:02:00

물기에 젖은 블라우스를 입은 이미숙의 사진을 군 복무 중 철모에 넣고 다녔다. 영화 ‘겨울나그네’(아래)에서 그녀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줬다.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내 기쁜 젊은 날’에서 이미숙을 빼면 황량한 기억뿐”이라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노트북 화면 너머로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바로크 음악만 나오는 삿포로(札幌)의 허름한 커피숍이다. 일본에는 아직도 우리나라 1980년대 분위기의 커피숍이 많이 있다. 도쿄(東京) 와세다대에서 안식년을 보내다가, 연말연시를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보내기로 했다. 무릎까지 빠지도록 내리는 눈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대처럼 이곳에선 눈이 한번 내렸다 하면 50cm는 족히 된다.

그때,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내겐 어제 같은 80년대 초, 강원도 화천 북방의 철책에도 여기 삿포로처럼 눈이 많이 왔다. 정말 추웠다. 그리고 너무 무서웠다. 군사정권이 아무나 ‘투사’로 만들어 주던 시대였다. 그저 욱하는 성격 탓에 아주 쉽게 제적을 당하고, 아주 간단히 ‘강제징집’ 당했다.

나는 그곳에서 생전 처음 까마귀를 봤다. 한겨울에 하얀 눈 위에 모여 있는 까마귀 떼는 공포 그 자체였다.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난 좌절을 습관처럼 반복했다. 얼마 후, 난 정말 아무 생각도 없어졌다. 그저 취사장의 남은 누룽지를 탐할 따름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자진해서 취사장 사역을 나갔다. 그런데, 아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내게 일어났다. ‘군대(軍大)’의 전문 학술지인 ‘Journal of Sunday(선데이서울)’ 한 부를 얻게 된 것이다. 게다가 누더기같이 닳고 닳은 그 잡지 안에 아직도 컬러 화보가 한 장 남아 있었다. 컬러 화보가 내 순서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진을 뜯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물기에 젖은 블라우스를 입은 이미숙의 그 사진은 내 정신을 한동안 혼미하게 했다. 난 그 사진을 철모에 넣고 컬러 사진의 색이 바래도록 머리에 이고 다녔다. 철모를 벗으면, 그녀는 항상 묘한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콧등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녀의 그 착한 눈매는 철책의 한구석에서 보낸 ‘내 기쁜 젊은 날’을 참으로 오랫동안 함께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내가 가장 즐겨 듣게 된 것도 다 그녀 때문이다. 사랑에 지친 겨울나그네는 성문 앞 우물곁의 보리수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랜 후, 얼어붙은 냇물에 다다른다. 이때 부르는 연가곡의 6번 ‘홍수(넘쳐흐르는 눈물)’와 7번 ‘냇가에서’를 듣다 보면 정말 가슴이 찢어진다. 나그네는 냇물 앞에서 또 운다. 쌓인 눈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내 눈물이 이 눈을 녹이고, 그 녹은 물이 냇물을 따라 흘러가면 그녀의 집 앞까지 가겠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이 불쌍한 나그네는 얼어붙은 냇물을 건너다가 또다시 그녀 생각이 난다. 날카로운 돌을 구해 얼어붙은 얼음 위에 그녀의 이름과 만난 날짜, 그리고 헤어진 날짜를 쓴다. 녹아 없어질 얼음 위에. 그 얼음조각이 튈 때마다 이 나그네의 가슴도 찢어진다. 이 부분은 마티아스 괴르네의 곡 해석이 가장 절절하다. 피셔디스카우의 노래는 눈물이 금방 마른다.

이 철없는 겨울나그네처럼 나도 한없이 울면서 그 영화를 봤다. 이미숙이 주연한 ‘겨울나그네’. 그 영화에서 그녀는 숨겨놓았던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지금도 나는 혼자 잘 운다. 그러나 그때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던 적은 없다. 단지 사귀던 여자가 갑자기 결혼하게 되었다고 통보해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운동권 언저리에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던, 여전히 미래가 고통스러운 내 젊은 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운 그녀가 슬픈 것이 슬펐을 따름이었다.

그녀가 첼로를 들고 가다 강석우와 부딪힌 그 캠퍼스의 언덕길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가끔 학회 관련 일로 그 대학의 캠퍼스를 들를 때면 그녀를 떠올리며 서러워한다. 강석우가 바래다 주고 돌아서던 그 언덕 위의 하얀 집과 담장 위의 목련꽃을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한다. 지금은 예쁜 레스토랑으로 변한 그 집에 가끔 혼자 들러, 그 집만의 특별한 과일셔벗을 쩝쩝거리며 먹기도 한다.

‘겨울나그네’를 본 이후로 난 항상 주장했다. 남자의 가장 큰 행복은 사랑하는 여인의 악기 케이스를 들어주는 일이라고. 그 후, 나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아가씨와 사귀면서, 그녀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어줄 수 있었다. 참으로 즐거웠다. 아가씨가 바뀌어 첼로 케이스를 들어줄 수 있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조금 무거웠다. 피아노를 치는 아가씨와 사귀면서부터 나는 조용해졌다. 피아노를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악 하는 아가씨와 사귀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 자체가 악기인 그녀의 몸무게는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녀와 함께 산다.

‘내 기쁜 젊은 날’에서 배우 이미숙으로 매개되는 기억들을 제하고 나면, 참으로 황량한 기억들뿐이다. 최루탄과 거친 운동가요의 기억들로는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자신의 과거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행위를 심리학에서는 ‘내러티브’라고 한다. 내 개인사의 내러티브에서 배우 이미숙으로 매개된 의미 부여의 과정은 언제나 깊은 좌절과 슬픔이 끝에 맞물려 있다. 객관적 상황이 어려울수록 주관적 의미 부여의 노력은 더욱 절절해지는 까닭이다.

눈 내리는 삿포로의 한구석에서 이 글을 쓰다 보니 객지의 쓸쓸함으로 기분이 묘해진다. 내일은 오타루(小樽)에 가야겠다. 오타루의 눈밭에서 ‘오겐키데스카’를 애타게 외치던 나카야마 미호(中山美穗)가 ‘겨울나그네’의 그녀, 이미숙을 참 많이 닮아서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사연 많은 눈과 섬세한 콧날 사이에서 늘 길을 잃어요▼

982년 군복무 중 이미숙의 사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김정운 이병에게 미스터리였다. 어떻게 섹시함과 청초함, 야성적 백치미와 도회적 지성미가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김 이병은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 사진을 비닐로 코팅해 2년간 고이 간직했다고 했다.

“2년쯤 지나니까 색이 바래져서 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워요. 그런 명품이 또 없는데….”

이미숙이 데뷔한 것은 1979년 ‘모모는 철부지’라는 영화를 통해서였으나 김정운(사진) 교수가 그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85년 제대 후였다.

“첫 작품이 ‘뽕’이었고 그 다음이 ‘겨울나그네’였어요. 뽕이 그녀의 섹시한 면만 담았다면 겨울나그네야말로 그녀의 진짜 매력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그는 이후 이미숙이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를 찾아 봤다.

“제가 좋아하는 이미숙의 모습은 ‘정사’(1998년 작)를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지지만 그래도 옛 추억에 빠지기 위해 ‘울랄라 시스터즈’나 ‘스캔들’ 같은 작품도 빠짐없이 섭렵했지요.”

그렇게 훌쩍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는 그 수수께끼를 좀 풀었을까.

“그녀의 매력은 도통 확인이 안 된다는 데 있어요.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이제 여자를 제법 안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그 눈과 섬세한 콧날 사이에선 그만 길을 잃어버리거든요.”

안식년을 맞아 내년 8월까지 일본 와세다대 특별연구원으로 체류하는 김 교수는 가족과 함께 눈의 도시 삿포로 일대를 겨울나그네로 떠돌고 있다. 꿀맛 같은 가족여행의 틈을 쪼개 원고를 써 보내면서 “이런 글을 쓰게 해 줘 너무 행복하다”고 즐거워하는 이 ‘간 큰 사내’의 아내는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며 여유 만만이니까. 하하….”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세월이 흐를수록 매력을 더해가는 여배우 이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