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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곽승준]‘딴나라당’은 아직도 꿈꾸는가

입력 | 2006-09-20 03:00:00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여운 속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보 보수 논쟁이 한창일 때였다. 시간을 내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 보았다. ‘진보’ 하면 연상되는 단어를 물어보니 참신, 개혁, 다양성 등을 적어 냈다. 반대로 ‘보수’ 하면 생각나는 단어로는 수구, 부패, 기득권이라는 낱말을 꼽았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정확한 개념보다는 막연히 진보는 좋은 것, 보수는 나쁜 것 식의 이분법이 작용하는 듯했다.

당시 여당 측 선거 전략가들이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 등 젊은 층이 많이 쓰는 의사소통 도구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언어 선점에 성공한 결과였다. 같은 시기 자칭 보수주의를 대표한다는 제1야당 한나라당은 사상 체계로서의 보수의 개념 정의는커녕 자신들이 어떤 의미로 보수주의를 사용하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진보 보수 개념을 경제 분야와 관련해 질문하니 더 부정확한 응답이 쏟아졌다. 자유시장경제가 진보냐 보수냐는 질문에 많은 학생이 진보라고 답했다. 반대로 정부주도형 경제를 보수라고 규정했다. 자유시장경제와 다양성 그리고 개혁과 변화의 물결은 원래 보수에 속하는 속성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가치들이 진보를 주장하는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보수주의자로 자처해 온 사람들도 개혁적 보수, 중도적 보수, 새로운 보수 같은 어정쩡한 신조어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념 혼돈은 한나라당을 포함한 한국 보수 세력의 정체성 확립 실패와 대국민 홍보 부족, 나아가 스스로의 개혁을 게을리한 데 따른 결과다. 이로써 지난 대선은 이념 논쟁을 부추긴 집권 여당의 승리와 안이한 대세론에 사로잡힌 한나라당의 연패로 끝났다. 한나라당이 기존의 수구 부패 이미지를 벗지 못한 채 민심과 동떨어졌다고 해서 ‘딴나라당’으로 불린 것도 이때쯤이다.

이제 4년이 흐른 지금 젊은 층은 또다시 확연히 변하고 있다. 일단 이념 논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민주화나 개혁보다는 취업과 미래의 경제전쟁에서 살아남을 자기 투자가 더 큰 관심사다. 젊은 층은 현 정부 들어 취업문이 더 좁아졌고, 먹고살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막연한 반미와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대학 신문사의 ‘이중국적일 경우 미국국적과 한국국적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50%가량의 학생이 미국국적을 택하겠다고 할 정도로 이중성도 안고 있다.

최근 갑자기 노무현 정권이 이슈화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문제는 많은 젊은 층이 전시작전권 환수의 의미와 그 정치적 경제적 파장, 나아가 국익에 얼마나 손해가 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노 정권의 경제 실정(失政)으로 진정한 보수로 회귀하는 젊은 층의 가슴에 막연히 내재된 반미와 민족주의에 다시 불을 지피는 형국이다.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2002년 대선 때 막연한 반미 성향의 젊은 층을 재결집하는 데 미군 장갑차 교통사고로 터진 효순 미선양 사건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한심한 것은 보수를 대변한다는 한나라당이다. 이 당은 최근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이나 정책 대안 하나 못 내놓고 있다.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로 사회 각계 인사와 일부 언론이 현 정권을 상대로 민족의 운명을 건 사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그것도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피감기관에서 골프나 즐기고 있었다.

자주국방에 600조 원이 필요하고 ‘비전 2030’에 1100조 원이 필요하다는데, 지금의 경제성적표를 보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지난 3년간 국가부채는 150조 원이 늘었고 평균 경제성장률은 4%도 안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대안이 한나라당엔 ‘부재중(不在中)’이다. 법조인 출신이 그렇게 많은데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 및 동의 절차의 법 위반도 미리 지적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진정한 야당이면 좌파 성향의 여당을 정책적으로 견제하고 국익을 먼저 생각하며 민심을 보듬어야 한다. 계속 딴나라당으로 불리는 한 정권 창출의 기대는 한낱 꿈에 그칠 것이다. 이제는 꿈에서 깰 때다.

곽승준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교수 sjkwak@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