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냥 피식 웃고 만다.
요즘 플레이에 물이 오른 것 같다고 하자 “늘 똑같아요. 뭐 달라질 게 있나요”라며 싱겁게 웃고 끝내 버린다. 진짜 늘 똑같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공만 찬다.
그는 늘 푸른 소나무다. 남산 위에 서 있는….》
●“을용 굿!” 아드보의 남자로 다시 나다
한국축구대표팀의 든든한 버팀목 이을용(31·트라브존스포르). 28일부터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대표팀 해외전지훈련에서 그는 이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눈길을 가장 많이 받는 선수가 됐다. 훈련 중 미니게임을 할 때면 아드보카트 감독이 “을용, 저쪽으로 패스하란 말야” 목청을 높여 이을용을 독려하거나 “을용, 잘했어”라고 외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26일 열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평가전이 끝난 뒤 좀처럼 특정 선수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던 아드보카트 감독은 드러내놓고 “이을용의 플레이가 가장 만족스러웠다. 오늘 승리의 수훈갑은 이을용이다”라고까지 했다. 이런 총애를 받아도 이을용의 표정은 한결같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되묻는 듯 열심히 공만 찬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축구에만 매진하는 이을용의 스타일이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을 비롯한 네덜란드 출신 감독들을 사로잡는 이유다. 플레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침착하고 냉철하다. 절대 무리를 하지 않는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상대의 공격을 예리하게 끊고 곧바로 공격으로 넘겨주는 패스에 센스가 넘친다.
●막일꾼-나이트클럽 웨이터 방황하다 그라운드로
이을용의 축구엔 그의 인생 역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1994년 강릉상고를 졸업하고 실력보다는 연줄로 모든 게 결정되는 한국 축구계에 염증을 느껴 공사판 막일꾼,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떠돌던 이을용.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지켜본 뒤 축구가 천직임을 깨닫고 한국철도에서 70만 원짜리 일용직 실업선수로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더는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맘먹고 밤낮없이 공을 찾고 결국 상무를 거쳐 프로팀 부천 SK에 몸담을 수 있었다.
삶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절제된 플레이와 상대 공격을 사정없이 자르는 ‘싸움닭’ 같은 자세가 결국 히딩크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에 일조하게 됐다. 이을용은 터키와의 2002 한일 월드컵 3, 4위전에서 그림 같은 프리킥을 성공시킨 게 인연이 돼 월드컵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유럽리그(터키)로 진출했다. 한때 FC 서울의 구애 때문에 잠시 국내 복귀를 하기도 했지만 터키로 다시 돌아간 이을용은 파워와 기술로 무장된 유럽선수들과 부대끼며 한층 성숙해졌다. 26일 보스니아전에서 공격의 템포를 조절하며 밀고 당기며 한국을 리드한 그의 플레이를 보고 전문가들은 “이번 월드컵에서 이을용이 한국 축구의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이을용은 너무 나서지 않아 코칭스태프를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전문가들이 “한국축구에 황선홍 홍명보 같은 구심점이 필요하다”며 그 대안으로 이을용을 제시하지만 이을용은 묵묵히 공만 찰 뿐이다. 대표팀의 한 관계자는 “선수들을 장악하고 리드하기는 힘들 거예요. 워낙 성격이 조용해서…. 또 국내에서 뛰면서 선수들과 많이 친해졌다면 모를까”라고 말했다.
●수비 공격 모두 뛰어난 멀티플레이어… “어디에 쓸꼬?”
하지만 최근 열리는 대표팀 훈련을 지켜보면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을용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더 적극적으로 팀을 리드하기를 원하고 있고 이을용도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을용에게 “팀의 플레이를 만들어 주는 자리인 만큼 볼 배급 역할을 충실히 하라. 그리고 크게 외쳐 선수들을 독려하라”고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그만큼 팀을 잘 리드하라는 지시다. 이을용도 “내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해서 항상 수비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게임을 풀어주면서 찬스가 나면 적극 가담해 팀 공격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하고 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을용을 다목적 카드로 쓸 복안을 가지고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는 물론 수비까지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인 이을용을 때에 따라서 포백의 왼쪽 윙백이나, 공격형 미드필더로 투입해 이영표와 박지성을 다른 카드로 활용할 계획인 것.
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황선홍의 선제 결승골, 미국전에서 안정환의 동점 헤딩골을 도왔고, 터키와의 3, 4위전에서는 멋진 프리킥으로 골 그물을 가른 4강 신화의 주역 이을용. 이번엔 어떤 신화를 쓸 것인가. 관심거리다.
글래스고=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푸하하하∼” 다시 보는 ‘을용타’
‘을용타’가 다시 한번 누리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을용타’는 이을용의 이름에 때릴 ‘타(打)’자를 붙여 만든 합성어. 2003년 12월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한국-중국전 도중 이을용이 손으로 중국 선수의 뒤통수를 가볍게 치자 중국 선수가 할리우드액션을 취하며 넘어진 데서 비롯됐다. 이을용이 넘어진 중국 선수 앞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이 보도되자 누리꾼들이 온갖 장면으로 합성했다. 이후 ‘을용타’는 이 장면을 이용한 합성사진시리즈를 일컫게 됐다.
당시 중국의 역사왜곡 사건으로 반중감정이 일던 때라 이을용이 넘어진 중국 선수에게 역사 강의를 하는 장면으로도 만들어졌다. 이후 국내 정치인은 물론,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등 많은 이들이 이 시리즈에 등장하며 풍자대상이 됐다. 을용타는 리샤오룽 버전, 앙드레 김 버전, 취화선(최민식 주연 영화) 버전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되며 합성사진의 다양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놀이로 번져 나갔다. ‘을용타’는 기본적으로 이을용의 그라운드에서의 전투적이고 당당한 이미지에 기반을 둔다. 이를 통해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에 대한 응징, 불만스러운 정치인에 대한 비난 등을 표현하며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다.
글래스고=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