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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남진우]‘준비된 지도자’가 그립다

입력 | 2006-05-22 03:00:00


혁명은 일어난 다음 해가 가장 좋다. 최근 존경하는 한 선생님의 교수 퇴임 기념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4·19혁명을 겪은 그는 이듬해 맞이한 대학생활이 적어도 1년간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69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자 그곳은 바로 그 전년도에 일어난 1968년 5월혁명의 여파로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혁명은 발생하기 직전엔 사회적 대립과 긴장이 극한에 이르고 혁명 과정 중엔 희생과 손실이 따르는 반면 그것이 성공한 뒤 1년 정도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환상으로 축제 분위기를 유발한다. 그러다 혁명 발발 2년차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점차 기대가 환멸로 바뀌면서 사회적 갈등의 강도가 높아진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혁명 정도는 아니지만 선거 또한 이런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일정한 기간마다 많은 비용을 들여서 선거를 통해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다수결의 효능에 대한 믿음 외에 선거가 그 자체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새로운 통합을 낳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선거든 혁명이든 기대와 현실 사이엔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는 혁명만 하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선거만 하며 살 수도 없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 선거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가 빠르게 번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먹고살기 바쁜 대다수 사람에게 선거란 많은 경우 그들만의 잔치이거나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축제에 지나지 않기 쉽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정치 지도자란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여기서 새삼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정치인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재론하고 싶지는 않다. 최근 몇 년간의 체험 학습을 통해 우리 국민이 깨닫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준비된 지도자’라는 게 그리 흔하지 않으며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못지않게, 어떻게 처신하고 발언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려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자기 직책에 걸맞지 않은 행위나 발언을 하면서 그것을 인간적 진정성의 발로나 탈권위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또 다른 위선일 따름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하고 지도자는 지도자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어떤 대통령이 “나 대통령 맞아?” 하는 식으로 나온다면 그를 최고 권력자로 선출한 국민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엔 피곤해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런 지적이 굳이 필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정치 지도자를 꿈꾸며 우리 앞에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농담이 있다. 자신을 곡식 낟알이라고 믿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퇴원한 그는 자기 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하필이면 기르던 닭을 만났다. 닭이 자신을 쪼아 먹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다시 의사에게 달려갔다. 의사가 그에게 당신은 사람이지 곡식 낟알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농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걸 그 닭도 알고 있을까요?

슬로베니아의 재간둥이 지식인 슬라보예 지제크가 들려준 이 농담은 사람들이 얼마나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의지하고 있는 존재인지 말해 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타자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하다못해 마당을 오가는 닭한테서라도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지나친 자기 확신이 때로 화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역할이나 능력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사태를 그르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농담에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농부의 경우, 그의 착각이 무슨 큰 해를 불러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동이나 신념의 부족에 빠진 사람이 단순히 시골 농부가 아니라 한 공동체를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라면 어떠할까. 그의 엉뚱한 처신은 그 자신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조직 전체에 큰 소란이나 불필요한 다툼을 야기할 것이다.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정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들 가운데 정말 누가 ‘준비된 지도자’인지 가리는 것은 힘들지만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일이다. 제발 이번 선거로 선출된 사람 가운데 “나 도지사 맞아?” “나 시장 맞아?” 하고 ‘깨는’ 소리 하는 사람이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