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부인과 함께 7년간 자료를 수집한 끝에 ‘프리미엄 수화’를 펴낸 정택진 씨가 ‘사랑한다’는 뜻의 수화 동작을 해 보였다. 강병기 기자
1984년 대한항공 정비사로 일하던 정택진(42) 씨는 취미 삼아 수화를 배웠다.
어느 날 보육원에 자원 봉사를 나간 그는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인 이주순(39) 씨를 만났다. 청각장애인으로 그 보육원 출신인 이 씨는 자신이 자란 보육원을 위해 봉사를 하던 중이었다. 정 씨는 이 씨와 사귀면서 청각장애인이 모두 수화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청각장애인은 말을 듣지 못해 언어 습득이 늦을 수밖에 없어요. ‘맞다’는 알지만 ‘타당하다’는 모르는 거죠. 그런 이유로 아내도 운전면허 필기시험만 17번 떨어졌어요.”
정 씨는 1989년 이 씨와 결혼하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수화통역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정 씨는 부인에게 ‘정오’도 ‘점심’과 같은 동작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알려 주고 대화를 나누며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표현들을 골라 7년간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를 책으로 펴내기 위해 출판사를 돌아다녔지만 다들 출간을 거절했다.
그러다 우연히 2004년 1월 출판사 을지글로벌의 오명균 사장을 소개받았는데 알고 보니 오 사장의 동생 석균 씨는 1988년 정 씨에게서 수화를 배운 제자였다.
오 사장 형제 역시 청각장애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청각장애인과 수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터였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오 사장이 출간 기획을, 국어교사인 석균 씨가 책의 문법 감수를, 정 씨와 부인 그리고 고교 1년생인 아들이 책에 실을 수화 동작 모델을 각각 맡았다.
그렇게 장애의 아픔을 겪어 온 두 가족이 모여 만든 ‘프리미엄 수화’엔 단어 4000여 개와 미니 사전, 2500컷의 수화 동작이 실렸다.
정 씨는 현재 전문 수화통역사로 일하면서 KBS 2TV ‘사랑의 가족’ 수화통역을 맡고 있으며 가톨릭대 대학원 장애인복지학과에서 늦깎이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국내에 등록된 청각 언어 장애인이 16만 명, 많게는 35만 명에 이르는데도 학교에서 수화통역은 물론 속기 대필 등의 지원이 전혀 없는 등 학습권이 보장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프리미엄 수화’ 초판 인쇄 부수는 1만 부. 정 씨를 비롯한 공동 저자들은 모두 인세를 받지 않기로 했다. 정 씨는 “이 책은 지금도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 아내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며 “책이 어휘력을 향상시키려는 청각장애인, 그들과 의사소통하려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널리 보급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