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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돌놓는 소리 추억속으로…인터넷바둑에 ‘불계패’

입력 | 2006-03-14 03:04:00

입장하려면 줄지어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화랑기원’의 썰렁한 모습. 인터넷 바둑의 발달로 기원이 사라지고 있지만 ‘마니아’들은 오프라인 바둑의 맛을 잊지 못한다. 원대연 기자


“딱! 딱! 딱!”

10일 오후 6시 반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화랑기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바둑알 놓는 소리만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백발이 성성한 아마추어 기사(棋士) 2명의 눈빛은 판이 뚫어질 듯 매서웠다.

이들은 낮 12시에 문을 열고 6시간가량 케이블 TV에서 흘러나오는 지상파 재방송을 보며 소일하던 유해진(柳海振·63) 사장이 맞은 두 번째 손님이었다. 유 사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훈수를 두었다.

오후 8시가 넘어 할아버지 여덟 분이 모이자 껄껄 하는 웃음소리와 아쉬운 탄성이 기원을 메웠다. 밤 12시를 넘겨 “집에 가자”는 목소리가 나오곤 했지만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한 판만 더 하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한 이들은 오전 2시가 넘어서야 아쉬운 듯 자리를 떴다.

화랑기원은 10여 년 전만 해도 60평에 갖춰진 100여 석이 가득 차던 ‘명소’였다. 한번 입장하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정도다.

지금 이 기원은 20평으로 줄었다. 수지가 맞지 않아 나머지 40평은 만화방으로 바뀌었다.

기원의 하루 이용료는 4000원으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요즘 기원을 찾는 이는 하루 10명 안팎으로 줄었다. 이용객은 모두 나이가 지긋한 동네 단골이다.

유 사장은 “10년 전 한 달 매출이 600만 원 이상이었지만 요새는 만화방에서 버는 월 100만 원 수입으로 기원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1980, 90년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던 기원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기원 수가 10년 전에 비해 10분의 1로 줄었다고 추정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인터넷 바둑이 기원을 몰아낸 셈이다.

‘월간 바둑’ 이성구(李聖九·41) 편집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조훈현(曺薰鉉), 이창호(李昌鎬) 등 프로기사의 영향으로 호황을 맞은 기원이 인터넷 바둑이 등장하면서 급격히 줄었다”며 “바둑 인구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기원을 찾는 이가 줄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들에는 매년 회원이 늘고 있다. 2004년 9월 23만여 명이던 한게임 바둑 사이트 방문자는 지난달 72만여 명으로 늘었다. 넷바둑은 가입자가 매일 1500여 명씩 늘어 300만 명이 넘었다.

3년 동안 인터넷 바둑을 즐겨 온 김동철(33) 씨는 “언제든지 급수가 맞는 사람끼리 둘 수 있어 오프라인 기원보다 인터넷 바둑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원 마니아’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15년 동안 거의 매일 화랑기원을 찾았다는 김창복(62) 씨는 “차 한잔을 마시며 얼굴을 맞대고 기원에서 두는 바둑이 진짜”라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