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64)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1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ICTY 관계자들은 평소 그가 심장질환과 고혈압을 앓았다는 점으로 미뤄 ‘돌연사’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자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변호사 젠코 토마노비치 씨는 12일 “밀로셰비치가 사망 전날인 10일 자신에 대한 독살 가능성을 우려하는 6쪽 분량의 편지를 남겼다”고 주장했다.
독성 약물 검사를 포함한 부검은 독일의 법의학연구소(NFI) 주관 아래 세르비아 의료진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12일 헤이그에서 실시됐다. 장례식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을 거쳐 1997년 신유고연방 대통령이 된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전쟁(1991∼1995년), 보스니아전쟁(1992∼1995년), 코소보전쟁(1998∼1999년) 등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을 촉발했다.
ICTY는 전쟁 및 반인륜 범죄혐의와 1995년 보스니아에서 7000명의 이슬람교도를 학살한 혐의로 그를 기소해 2002년 2월부터 재판을 벌여 왔다. 재판은 올해 말 그에 대한 종신형 선고로 마무리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사죄도 하지 않았으며 “내가 내린 결정은 모두 합법적이고 유고 헌법과 자위권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로셰비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ICTY는 평소 밀로셰비치에 대한 ‘허술한 신병 관리’에 따른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
또 바로 6일 전 2002년 밀로셰비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그의 옛 동료 밀란 바이치 전 세르비아 민주당 지도자가 같은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점에서 ICTY 측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발칸 대학살의 희생양이었던 코소보 등지에서는 ‘밀로셰비치를 단죄해 정의를 세울 기회가 사라졌다’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국제인권감시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한 관계자는 “(밀로셰비치의 죽음은) 희생자들에게는 좌절이고 정의엔 역행”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가 주창했던 ‘세르비아 대제국 건설’에 동조해 온 세르비아 일각에서는 애도 물결과 함께 ‘독살설’이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밀로셰비치는 건강 악화로 인해 올 초 러시아에서 치료를 받겠다는 청원을 냈지만 ICTY는 이를 거부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는 1990년대 발칸 유혈 인종청소 당시 밀로셰비치를 지원했으며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무력 개입에도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