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었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평생 화두로 가슴에 묻고 계신다는 정진석 추기경의 말씀(동아일보 8일자 A1·10면 참조)을 읽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그 골고다 언덕을 얼마 전 내가 걸으면서 가졌던 감회가 되살아난다.
“예루살렘의 돌멩이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파괴되리라”고 예견하셨던 예수의 그 절망과 비탄이 다시 저미어 왔다.
“내 슬픔 같은 슬픔이 또 있는지 살펴보아라. 위로부터 그분이 내 뼛속에 불을 보내시어 나를 응징하셨고 내 발이 걸리게 올가미를 쳐 놓으셨으며 나를 돌려세워 외롭게 하여 진종일 슬퍼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외친 수난의 비통함을 골고다 언덕을 걸으면서 나는 들었다. 십자가 사건 2000년 후 한국의 한 여성 수도자, 소태산 대종사(원불교의 창시자)의 심부름꾼인 내 마음속에도 “저도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있었다. 가까이서 묵묵히 걷고 있는 곽베아타 수녀의 그 침묵 속에도….
출가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서원이 살아 있다. 그 체험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불자야, 듣느냐 중생의 부름을. 건져 줘, 살려 줘 애끓는 저 소리.” 그렇다. 우리 출가자들은 끊임없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다. 또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정 추기경의 화두가 이 시대 모든 수도자의 가슴에 있기를 염원한다.
불교의 비구니, 원불교의 교무, 천주교·성공회의 수녀 등으로 구성된 한국 여성 수도자 모임인 ‘삼소회’의 회원들은 5년 전부터 월 1회 명상기도를 통하여 ‘세계 종교성지 순례’의 꿈을 키워 왔다. 테러도 반(反)테러도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독선과 아집과 편견을 넘어, 종교의 울도 넘어 모든 성자의 본의가 하나임을 믿고, 모든 성자의 가르침이 오직 평화임을 가슴에 거듭거듭 새기며 순례를 했다.
순례 기간이던 지난달 22일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이 교황청을 가득 메웠다. 이 자리에서 ‘종교 화해’의 상징으로 삼소회가 소개됐으며 회원들은 일어나 합장하고 두 손을 흔들어 교황께 인사드렸다. 그런데 곧이어 그 자리에서 정 추기경의 서임 발표를 받들게 되다니! 이 기막힌 기연, 하늘의 선물을 받은 심경이었다.
정 추기경이 추기경으로서의 첫걸음으로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에 민족화해센터 및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립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6·25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족의 불행을 치유하고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트시려 하는구나 하고 짐작했다. 감사할 일이다.
정 추기경은 “모세에겐 자기는 없었고 오직 백성만이 있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도 없었고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정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성소이니 물질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정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흔히 ‘산타클로스’라 불리는 성 니콜라오를 세례명으로 받았다는 정 추기경, 그가 우리 민족에게 평화와 화해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기를 기원한다. 또한 한 종교의 수장이라는 자리를 넘어 모든 종교가 민족의 염원을 한마음으로 한 기운으로 파수공행(把手共行)하는 큰길을 열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종교 사회인 이 나라에서 종교 화합의 꽃을 피우는 일을 하실 때 교황청에 물결치던 그날의 함성이 아름다운 꽃비가 되어 내리기를 빈다. 관용과 화해의 물결이 이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
김지정 원불교 교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