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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파워그룹 그들이 온다]외국어고 출신

입력 | 2006-01-09 03:02:00


《2003년 3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평검사의 대화. “법무부가 검찰의 영향을 받지 않듯이 검찰도 법무부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휘부가 말리는 수사를 하는 검사나 (정치적으로) 큰 사건을 하는 검사는 지방으로 날려버립니다.” 서울중앙지검 김윤상(金潤相·37) 검사는 강단 있는 발언으로 ‘스타 검사’로 떠올랐다. 김 검사는 대원외국어고 2기다. 이 학교는 설립 22년 만에 김 검사 같은 20, 30대 법조인 154명, 행정고시 합격자 36명, 외무고시 합격자 11명, 공인회계사 96명을 배출했다. ‘외고생은 우수하다’는 이미지는 이렇게 형성됐다.》

과거보다 비중은 낮아졌지만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진학이나 고시 합격은 아직도 인재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로 쓰인다.

1984년 설립된 대원외고와 대일외고를 필두로 한영, 명덕, 명지, 용인 등 전국 외고가 인재 배출의 가장 큰 풀(pool)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다.

○ 전문 분야별 모임 강해

서울과 부산의 고교평준화는 1974년 시작됐다. 따라서 입시를 치르고 서울과 부산의 명문고에 입학한 막내 기수의 나이는 올해 만 49세. 이제 현역에서 슬슬 물러나야 할 때다. 이 틈새를 외고 출신들이 빠르게 메워 가고 있다.

대일외고는 법조계 50여 명, 의료계 100여 명, 국제금융전문가 80여 명, 국제통상전문가 20여 명, 국제 경영컨설턴트 50여 명을 배출했다. 1990년 개교한 한영외고에도 법조계 44명, 의료계 37명, 언론계 50명의 동문이 있다.

외고가 고교평준화 이전의 명문고를 대체하는 신흥 명문고로 떠오른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터넷 법률정보회사 오세오닷컴에 따르면 1970년대에 태어난 법조인 가운데 대원외고 출신은 43명으로 경기고 30명보다 훨씬 많다.

외고 동문들은 법조계 경제계 등 전문 분야별로 모임을 갖고 있다.

2002년 3월 발족한 대원외고 경제인포럼의 회원은 현재 400여 명. 월 1회 비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갖는다. 동문 가운데 전문가를 초청해 주식시장 마케팅 트렌드 지식경영 등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자연스럽게 창업이나 사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포럼 발족 직후 건설경기가 좋아져 H건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아파트를 짓게 됐다. 비축했던 자재가 금세 동나 월급을 주면서 현장 근로자들을 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H건설에서 일하는 동문은 포럼에서 만난 자재회사를 운영하는 동문에게 요청해 필요한 자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 포럼 회원은 “우리에겐 따로 기댈 만한 선배가 없다”면서 “미약한 기반을 보완하자는 취지에 공감하는 동문이 많아 포럼에 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고 말했다.

외고 동문은 1기가 채 마흔이 안 됐고 사회에서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연령층이어서 각종 모임에 대한 열기가 기존 명문고보다 훨씬 뜨겁다는 것.

연세대 한준(韓準·사회학과) 교수는 “외고 동문이 파워그룹으로 자리매김 할지는 더 지켜봐야 하지만 기존 명문고가 해체되는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재벌 2, 3세 등 상류층 자녀 많아

외고 출신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옛 명문고를 닮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점이 더 많다.

과거 명문고들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폐쇄적이었던 데 비해 외고 출신들은 지역 의식이 약하며 개방적이다. 학연이 중요하긴 하지만 직연(職緣)을 더 중시한다. 글로벌 마인드와 네트워크에 강하다.

개방성은 직업의 다양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탤런트 유준상, 안재환, 정재곤, 서현선, 가수 김민우와 ‘고교생 얼짱 프로 골퍼’로 유명한 최나연 등은 대원외고 출신이다. 대일외고 출신으로는 가수 김승진, 한영외고 출신으로는 평론가 강유정(姜由楨) 씨 등이 유명하다.

또 컨설팅회사나 외국계 금융회사, 로펌 등에서 일하는 동문도 많다. 국제기구를 비롯해 해외에도 많이 진출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동문 중에는 재벌 2, 3세도 적지 않다. 호텔신라 상무로 있는 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의 장녀 부진(富眞) 씨는 대원외고 출신이며 현대, SK, GS그룹의 오너 자제 중에는 대일외고 출신이 많다.

대일외고 서우석(徐宇奭) 동창회장은 “상류층 자녀가 많이 다니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대원외고 박태준(朴泰濬·37·엔바이오ENG 대표) 동창회장은 “동창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필립스 엑시터, 세인트 폴스 같은 명문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외고가 진정한 명문고로 자리 잡을지, 입시제도가 바뀌면 입지가 흔들릴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대 박길성(朴吉聲·사회학과) 교수는 “아직 외고마다의 독특한 교풍은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선진국 명문고 출신은 그 학교를 나온 것만으로도 리더 자격을 갖추는데 외고는 아직 그런 위치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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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기자 stein33@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 수업 어떻게

‘차별화된 수업이 외국어고의 경쟁력이다.’ 외고에서는 대부분의 영어 수업을 원어민 강사가 진행한다. 또 외부의 유명 인사를 초빙해 특정주제의 강의를 하기도 한다. 원어민 강사와 학생 간의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 외고의 수업 장면. 동아일보 자료 사진

외국어고가 설립 초기부터 학부모들이 선망하는 대상은 아니었다.

대원외고와 대일외고가 1984년 개교했을 때만 해도 “저 학교는 직업학교라서 졸업 후 별도 검정고시를 쳐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학교 이름도 외국어고가 아니라 외국어학교였다.

하지만 이들 학교는 입시 위주 교육으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이른바 ‘SKY대’에 적잖은 학생을 진학시켰다. 그 결과 1988년 이후 우수 학생이 대거 몰렸다.

대원외고 2기인 이모(37) 씨는 “고교 시절 추억은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으며 밤늦게까지 공부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들어 전국에 많은 외고가 생기면서 경쟁 체제를 갖추자 학교 분위기도 점차 바뀌었다.

외고의 수업은 일반 고교와 달리 원어민 강사 위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대부분 2, 3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평균 토익 점수는 850∼900점이다.

방학 때는 외국 학교와의 교류 연수에 참가하거나 관심 분야의 현장을 체험하기도 한다.

다른 고교에서 찾기 힘든 교육 프로그램도 많다.

대일외고에는 영어 중국어 경제 심층학습으로 구성된 ‘국제금융기초과정’, 영어 독일어 법학 심층학습으로 된 ‘로스쿨 진학 기초과정’이 있다. 이화외고는 국내외 유명 인사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 ‘여성 지도력 훈련’과 고전을 통한 심성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원외고는 전문가 학부모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다.

최근에는 외국 명문대 입학을 겨냥해 유학반을 경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성주 기자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