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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산책]똑똑한 언니-날라리 동생…‘당신이 그녀라면’

입력 | 2005-12-30 03:05:00

죽을 줄로만 알았던 외할머니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두 자매의 화해와 치유의 과정을 따뜻하게 담아낸 영화 '당신이 그녀라면'. 사진 제공 디어유


이 영화의 첫 40분에 당신은 무척 당혹스러울지 모르겠다. 기대와 달리 포복절도할 코미디도, 섹스를 들먹이는 반쯤 지저분하고 반쯤 화끈한 농담도 보여줄 조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린다면, 당신은 제법 후한 선물을 받을 수도 있겠다. 나도 모르는 새 뜨거운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그런 느낌….

내년 1월 5일 개봉되는 영화 ‘당신이 그녀라면’은 사실 대단한 영화는 아니지만 뻔한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평평하게만 보이던 거울을 생각 없이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 속에서 아름다운 깊이를 발견해 내는 순간과 흡사한 정서적 경험을 하게 만든다. 평범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다 특별한 느낌을 얻게 되는 것 말이다.

로즈(토니 콜레트)와 매기(카메론 디아즈) 자매는 영 딴판이다. 변호사인 언니 로즈는 지적이지만 왕성한 식욕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평생 품고 산다. 반면 뭐든 섹스로 해결하려는 동생 매기는 매혹적인 몸을 가졌지만 머리가 텅 비었다는 자책감이 뿌리 깊다. 동생 뒤치다꺼리에 질린 로즈는 어느 날 자기 애인과 동생이 동침한 사실을 알고 동생을 내쫓는다. 갈 곳 없는 매기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외할머니 엘라(셜리 매클레인)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고, 할머니가 살고 있는 실버타운으로 향한다.

‘당신이 그녀라면’에는 과장된 캐릭터도, 부풀려진 사건도, 타오르는 갈등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반된 개성을 가진 자매의 삶이 갖는 명암을 대비시키면서도 영화는 ‘극과 극’의 차이에서 오는 ‘진기명기’식 에피소드들을 전시하기보다는, 반대로 둘이 어떤 하나의 점을 향해 점차 수렴되고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자매는 외할머니를 통해 하나의 접점에서 만나는데 그건 바로 우리 모두는 상처받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동시에, 그럼에도 남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관객이 ‘극적인 무엇’을 습관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그 지점에서 오히려 숨을 고르고 섬세한 감정의 줄을 잡아냄으로써 ‘가족애’라는 진부한 단어를 특별한 의미로 되살아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이 영화가 가진 순진한 얼굴은 사실 영악한 계산의 결과물이다. 심심해 보이는 이야기를 가졌음에도 어느 한구석은 늘 통통 튀는 탄력을 잃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카메론 디아즈라는 섹시 스타의 몸매를 하나의 ‘드라마’로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삼각팬티, 사각팬티, 비키니, 혹은 초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등장하는 카메론 디아즈의 몸매는 그 자체로 실버타운처럼 따분한 이야기를 요상하게 요동치게 만드는 도발적인 재료가 된다.

언니 로즈의 말마따나 “섹스 말고는 일을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를 단골로 자처하고 있는 카메론 디아즈는 알고 보면 ‘몸만 있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전형적 이미지를 극단까지 밀어붙임으로써 결과적으론 그 이미지를 마음껏 희롱하는 아름다운 승리를 거두는 연기자다. ‘뮤리엘의 웨딩’에 이어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여자 역을 맡은 토니 콜레트는 캐릭터를 풍선처럼 부풀리기보다는 반대로 차돌멩이처럼 밀도를 높이는 선택을 통해 현실과의 절묘한 거리조절을 이뤄낸다.

‘당신이 그녀라면’에서 또 하나 통쾌한 일은, 이 자매가 자신의 삶에 가로놓여 있던 마음의 장애물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화해’의 방식을 통해 운명을 극복한다는 사실이다. 왕성한 식욕을 부끄러워하던 언니는 식도락을 즐기는 회사 동료와 각양각색의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키워 나가고, 난독증(難讀症)에 시달리던 동생은 병상에 누운 한 노인에게 아름다운 시를 읽어 주는 방식으로 증세를 극복한다. ‘LA 컨피덴셜’ ‘8마일’의 커티스 핸슨 감독.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