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假定)은 필요하지 않다.” 이제는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경구(警句)다. 그렇지만 한번 가정해 보자.
그가 조국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같이 흘러갔을까. 아니, 한반도의 남쪽에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는 있었을까, 또는 그가 다른 제3의 지역에서 활동을 모색했다면….
1904년, 이승만(李承晩)은 7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막 끝낸 29세의 혈기왕성한 인물이었다.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해 ‘황제폐위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그의 뜻을 아낀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11월 5일 환송객 하나 없이 인천항을 떠난 그는 25일 만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90년의 생애에 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그의 미국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미국행이 단지 우연의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배재학당 재학시절 그는 10년 동안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에 대한 꿈을 키웠다. 조직과 선전에 능했던 그는 명운이 기우는 조국을 떠나 미국과 재미동포라는 풍성한 물 속에서 헤엄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미국 땅을 밟은 이승만은 물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동포들을 상대로 애국 강연을 펼치고 문전박대를 불사하며 미 정부 인사들을 찾아다녀 일본의 한국침략 저지를 호소했다. 도미 6년 만에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주미 대사’ 역할을 하며 조국의 광복을 맞은 그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요, 전략가였다. 그 사실은 1948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가 한반도의 오랜 수도와 대부분의 인구를 포함하는 독립국가의 통치자로 취임한 데서 증명된다.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듯 그는 미국과 밀착해 조국의 분단을 가져온 사대주의자였을까. 대외비에서 해제된 미국 비밀문서들은 어느 시기에서나 이승만과 워싱턴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음을 드러낸다.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미국의 미온적인 대일정책을 비판하며 미국 관리들을 윽박질렀다. 그의 귀국은 소련과의 갈등을 우려한 미 군정청의 방해로 40일이나 지연된 1945년 10월에야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미국에 의해 ‘정해진 카드’가 아니라 결국은 미국도 승복할 수밖에 없었던 카드였던 것이다. ‘그가 미국을, 미국이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점도 그 승복에 한몫을 했겠지만….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