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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11년 佛수학자 갈루아 출생

입력 | 2005-10-25 03:16:00


1811년 10월 25일 프랑스 파리 교외 부르 라 렌에서 태어난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유년 시절은 딱 한 가지만 빼놓고는 행복했다.

‘산만한 수업 태도. 도저히 파악하기 힘든 성격. 재능은 있는 것 같지만 도대체 어떤 재능인지 알 수 없음. 결국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재능임.’

낙제생 갈루아의 가정통신문은 그가 학습 지진아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리 어려운 수학 문제라도 암산으로 해치우는 갈루아의 비상한 재능을 평범한 교사와 시험관이 알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연구하는 갈루아와 답안지에 늘어놓는 시험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다.

갈루아는 갈수록 학교에는 흥미를 잃게 됐지만 독학으로 기하학을 정복했고 기존 대수학을 무시하고 새로운 대수학의 체계를 정립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세. 갈루아는 16세가 되자 최고 명문인 파리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갈루아의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2년 후에는 순환연분수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 나왔고 주요 논문을 정리해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논문은 심사관이 요약분마저 분실해버렸고 에콜 폴리테크닉 입학시험은 또 떨어졌으며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고가 잇달아 일어난다. 이듬해 갈루아는 “많은 수학자의 연구를 단념시킬 연구”라며 3편의 논문을 다시 보냈지만 이 역시 없어지고 만다. 사회를 향한 갈루아의 증오는 극에 달했으며 결국 그는 과격 공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1830년 7월 혁명이 터지자 갈루아는 환호했다. 교장의 기회주의를 비난하는 글을 실어 퇴학당하자 국민병 포병대에 입대한다.

여기에서도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방정식의 일반 해법에 관한 논문, 일명 갈루아 이론을 과학원에 보냈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논문’이라는 판정과 함께 그걸로 끝이었다. 결국 투옥과 석방을 거듭하던 젊은 영혼은 만 21세가 되기도 전인 1832년 5월 31일 가출옥 중 연적(戀敵)과 결투를 하다 요절하고 만다.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매장된 갈루아의 묘는 이제 흔적도 없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생은 수학사에 변혁을 가져왔다. 갈루아 이론은 그가 죽고 난 뒤 완전히 이해되는 데만 70년이 걸렸고 기하학 대수학의 획기적인 발전과 함께 첨단 과학인 핵물리학과 유전공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