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대북(對北)사업이 삐걱거리고 있다.
그 중심에는 김윤규(金潤圭) 현대아산 부회장의 거취 문제가 놓여 있다.
현정은(玄貞恩) 현대그룹 회장이 김 부회장의 대표이사 직을 박탈하자 북한은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정부도 김 부회장의 퇴진에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국회는 현 회장과 김 부회장 등을 국정감사 증언대에 세워 대북사업의 실효성 및 김 부회장과 남북 당국의 관계 등을 따지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 김 부회장은 14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북사업은 어느 누구의 개인사업이 아닌 민족사업”이라며 오히려 현 회장을 겨냥한 듯한 말을 했다.
현대그룹 자체 감사에서 비리가 드러난 것으로 알려진 김 부회장. 남북한 당국은 왜 그를 감싸려 하고 현 회장은 왜 “비굴한 이익보다는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 16년 동안 대북사업에 관여
김 부회장은 그룹 안팎에서 대북사업의 대명사로 각인돼 있다. 1989년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평양을 방문한 이후 16년 동안 대북사업을 맡아 왔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사업의 첫 삽을 뜰 때 그는 현대아산의 전신인 대북경협사업단을 이끄는 단장이었다. 같은 해 10월 정주영 창업주와 함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확인된 것만도 5번이나 김 위원장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현대의 대북사업은 시스템이 아니라 김 부회장의 ‘개인플레이’에 의존하는 병폐가 나타났다. 북한은 7월 16일 원산에서 이뤄진 김정일-현정은 회동 때도 김 부회장만 동석시키고 함께 방북한 윤만준(尹萬俊) 현대아산 사장은 부르지 않았다.
○ ‘김윤규만 남고 다른 사람은 빠져라’
김 부회장의 북한 내 인적 네트워크는 광범위하다.
김 위원장을 여러 번 만났을 뿐 아니라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이종혁(李種革) 북한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임동옥(林東玉)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승철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등과도 연줄이 닿아 있다.
대북경협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북한은 협상 과정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면 김 부회장만 불러 문제를 푸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서 “협상이 어려워지면 ‘다른 사람은 나가고 김 부회장만 남으라’고 해 김 부회장을 유일한 담판창구로 활용하려 했다”고 전했다.
현대 안팎에서는 “오랜 거래 과정에서 김윤규가 입을 열면 다칠 수 있는 북한 인사가 적지 않다”는 미묘한 말도 나온다.
김 부회장은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과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업무 성격상 통일부와 자주 접촉해야 하는데 김 부회장이 전임 정세현(丁世鉉) 장관보다 정 장관과 더 가까운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을 만나게 한 연결고리도 김 부회장이라는 관측이 많다.
○ 시스템 아닌 사람 중심 대북사업
대북사업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협상창구를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면 투명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시스템이 자리 잡을 수 없고 의혹이 자라기 마련이다.
북한은 오랜 접촉으로 대하기 편하고 요구도 잘 들어주는 김 부회장을 선호하게 됐고, 급기야 “김 부회장 아니면 안 된다”는 억지를 부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현 회장도 결심 바꿀 가능성 낮아
현 회장은 남편인 고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자살을 불러올 정도로 그룹의 명운을 건 대북사업이 김 부회장 개인의 사업처럼 진행되는 데 거부감을 느껴 왔다.
특히 금강산에 갔던 남측 인사들 사이에서 ‘김윤규 왕국’이란 말이 나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 부회장에 대한 그룹 감사 결과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리’가 많았던 사실을 확인하고 경영 일선에서 퇴진시키기로 했다는 것이 현대의 설명이다.
따라서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남북한 당국이 압력을 가하더라도 현 회장이 김 부회장의 퇴진 결정을 뒤집을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것으로 보인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