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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09-03 03:04:00

그림 박순철


수레 밖으로 수풀처럼 창대를 늘어세운 기마대와 갑옷투구로 온몸을 싼 보졸들이 늘어선 것을 보고 역이기는 전해(田解)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럴수록 기죽지 않기 위해 거느린 인마를 큰 소리로 다그치며 성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다시 삼엄하게 군사를 벌여 놓은 전해가 나와 거만하게 맞았다.

“화무상(華無傷) 장군이 거느린 10만 군사까지 모두 성안에 들여놓을 수 없어 그들은 성 밖 벌판에 따로 진채를 벌이고 있소. 그래도 성안에 군사가 또 10만이 넘어 전사(傳舍)를 넉넉하게 비워두지 못했소이다.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나를 너무 허물하지 마시고 하룻밤 묵어가시오.”

그러면서 은근히 성안의 군세를 자랑하더니 제법 역이기에게 겁까지 주었다.

“우리 제나라는 항우의 10만 대군도 싸워 이긴 적이 있소. 우리 대왕의 명만 있으면 여기 있는 군사만으로도 거꾸로 조나라와 연나라를 우리 제나라의 북쪽 울타리로 만들 수 있을 터, 무엇 때문에 구차하게 한나라의 사신을 받아들이시는지 모르겠소. 나와 화무상 장군이 거느린 군사만도 20만이니, 조나라 연나라가 아니라 관중인들 우려빼지 못하겠소?”

그 말에 듣다 못한 역이기가 한마디 쏘아주었다.

“성안군(成安君) 진여가 지수((저,지,치)水) 가에서 우리 대장군 한신에게 목이 잘린 것은 거느린 군사가 20만이 되지 못해서는 아니었소. 싸움의 승패는 군사의 머릿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외다. 거기다가 나나 장군이나 남의 신하되어 시위에 얹힌 화살 같으니, 시위를 놓으면 날아갈 뿐 임금 된 이의 크고 깊은 뜻을 어찌 함부로 헤아리겠소?”

하지만 역이기와 전해의 그런 보이지 않는 기 싸움도 그날이 끝이었다. 다음날 아침 역이기 일행이 비좁은 전사에서 찌뿌듯한 몸으로 일어날 무렵 임치에서 달려온 유성마가 전해에게 재상 전횡(田橫)의 뜻을 전했다.

“한왕의 사신을 잘 대접하고 우리 인마를 딸려 돌보게 하며 임치로 보내라.”

제왕(齊王)도 한손으로 쥐락펴락하는 재상 전횡이 그렇게 말하자 전해도 더는 뻗대지 않았다. 역이기 일행을 하루 더 붙잡아 푹 쉬게 한 뒤 군사 몇 백까지 딸려 도읍인 임치까지 500리 길을 호위하게 했다.

역이기가 다시 엿새를 걸려 임치에 이르니 전횡이 성문 밖 10리나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전횡은 항우와 맞서 싸워 이겨낸 맹장(猛將)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재상으로 천하의 형세를 살피는 데도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한왕이 멀리 사신을 보낸 까닭이 듣지 않고도 짐작되는 바가 있었으나, 몸소 마중을 나가 슬며시 살펴보기로 했다.

임치는 그때 벌써 인구 50만을 일컫는 큰 도시였다.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때도 전화(戰禍)를 입지 않은 곳이라 모든 것이 넉넉하고 흥청거렸다. 역이기는 편안한 왕궁의 객관(客館)에서 며칠을 쉰 뒤 제왕 앞으로 불려나갔다.

“선생께서는 무슨 일로 이 먼 길을 오셨소? 한왕께서 과인에게 무슨 말을 전해 달라 하시더이까?”

역이기가 사신의 예를 올리자 제왕 전광(田廣)이 그렇게 물었다. 역이기가 그 물음에 대답은 않고 딴전을 피웠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