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정보원 도청테이프 처리 문제에 대해 “공개할 것은 공개하고 비공개할 것은 비공개하자”고 말했다. 테이프 안에 범죄 사실,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정리해야 할 사안, 보호돼야 할 사생활이 혼재(混在)해 있다면서 사실상 ‘선별(選別) 공개’를 제의한 것이다. 그러면서 ‘도청 내용 공개’에 관한 열린우리당의 특별법 추진에 힘을 실어 주고 한나라당 등의 도청 특검 추진에는 반대했다. 지난해 여당 안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이 일자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며 방향을 잡았던 상황의 재판(再版)이다.
이로써 도청테이프 처리에 대한 정권 측의 생각은 분명해졌다. 민간 인사들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테이프 내용 중 공개 및 수사 대상을 가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측면에서 위헌론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의 공개가 정보비밀 보호에 관한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민간기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사법적 권능을 행사하는 것은 헌법의 권력 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는 노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 독려는 ‘헌법의 수호자’로서 부적절한 행위이자 과오(過誤)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위헌 여부를 떠나서도 민간 위원 구성과 이들의 테이프 검증 과정에서 정치색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벌써 노 대통령의 어제 발언부터가 정쟁(政爭)에 기름을 부은 양상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3월까지 도청을 계속했다는 국정원의 ‘자백’과 관련해 “어떤 정치적 음모도 없다”고 강조했다. 김대중 정권도 도청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덮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도청 범죄와 그 결과물에 대한 수사와 공개를 둘러싸고 정략(政略)이 작용할 소지까지 배제된다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음모적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도청테이프 공개에 대해 여론만 따를 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국민 70%가 공개하라고 그런다”며 이를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과 슬쩍 연결시켰다. 대연정(大聯政)을 주장할 때는 ‘여론이 나쁘다’는 사실을 외면하다가 도청테이프 공개 문제에서는 여론을 끌어들이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