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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미림팀’ 불법도청 어떻게 했나

입력 | 2005-07-22 03:12:00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비밀도청팀 ‘미림(美林)’을 운영해 민간인까지 동원하면서 정계와 재계 핵심 인사를 무차별적으로 도청했다는 전직 직원의 증언이 나왔다.

기관원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그 내용을 비공식 채널을 통해 보고한 정황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일반인까지 포섭해 도청=정계 고위인사 A 씨가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고교 동문들과 약속을 잡는다. 이 내용은 ‘망원’(정보 제공 협조자)으로 포섭된 음식점 종업원에 의해 미림팀에 그대로 전달된다.

약속 당일 음식점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고, 옆방이나 근처 건물에 미림팀의 직원이 출동해 대화 내용을 일일이 녹음한다. 대화 도중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평소 생각을 얘기했는데 며칠 뒤 발언 내용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른다.

미림팀의 도청활동은 소설에나 등장할 만한 방법이다.

당시 안기부 직원의 말을 종합하면 미림팀은 위험을 감수하고 현장에서 직접 도청을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민감한 대화 내용을 적나라하게 수집할 수 있었다.

미림팀은 우선 정계와 재계 인사 등이 자주 가는 서울 시내의 주요 한정식집과 호텔의 직원을 망원으로 포섭했다. 이들에게 도청기 설치법을 직접 가르쳤다. 도청기가 설치되면 미림팀은 옆방에서 대화 내용을 직접 녹음했다.

전 안기부 직원 B 씨는 “밤새 테이프를 푸는데, 도청장치가 좋지 않아서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경우가 많아 밤새도록 녹취록을 작성하는 것이 가장 힘든 작업”이라고 말했다.

B 씨는 또 “미림팀은 이들 정보제공자를 관리하는 데 능숙했다”며 “아마 당시에는 안기부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음식점 등에 세무 편의를 봐주는 형식으로 대가를 지불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림팀이 정보 제공자들에게 일의 대가로 정기적으로 수고비를 지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전 안기부 간부 C 씨는 “미림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를 도청할지는 현장팀장이 결정했지 사전에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다”면서 “불법으로 도청한 걸 청와대에 보고한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말했다.

미림팀장을 지낸 D 씨도 “무모한 방법으로 도청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일상적인 도청은 유선 전화로=당시 안기부의 도·감청 업무는 수백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정식 조직과 비밀 조직인 미림팀으로 구분된다.

정식 조직은 대공 업무를 위해 국내외 전화통신을 감청하는 부서로 그 내용은 ‘메모’ 형식으로 만들어져 간부들에게 회람됐다.

그러나 이들도 정계와 재계 인사들이 자주 찾는 호텔 음식점, 요정, 룸살롱, 한정식집 등에 종업원의 협조를 받아 도청장치를 설치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 때문에 미림팀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별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죽 이어져 온 조직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도청팀은 8시간씩 3교대로 한시도 쉬지 않고 가동됐으며 안기부 간부들은 이들의 녹취 보고서를 읽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치인에 대한 도청은 매우 일상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상당수 정관계 인사들은 자택에서 은어(隱語)를 쓰거나 감지장치를 갖고 다니기도 했다.

도청 문제가 정치권의 이슈로 등장한 사례도 많다.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은 2002년 9월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과정에서의 로비의혹을 제기하며 국정원 고위간부만 볼 수 있다는 도청자료로 알려진 문건을 제시해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국정원은 “법 절차를 밟지 않은 도청은 결코 하지 않았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안기부 미림팀은▼

‘미림(美林)’은 정계, 재계, 언론계 유명인사들이 음식점이나 술집 등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도청하는 임무를 맡았던 정보기관 내 특수조직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전직 고위 관계자는 21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정치가 주로 요정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기 위해 만들었다”면서 “요정 마담과 접대부를 정보원으로 삼았고 때로는 도청을 했다”고 말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때까지 가동되던 미림은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인 1993년에 잠시 중단됐다가 1994년부터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국가정보원 직원은 “당시 정권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웠던 안기부 간부가 대공정책실장으로 부임하면서 미림이 활동을 재개했다”면서 “도·감청 담당국과는 별도로 대공정책실장 직속의 소규모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미림은 대공정책실장에게 도청 내용을 보고했고 그 내용은 때때로 안기부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청와대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이 직원은 전했다.

미림은 서기관급 팀장과 사무관, 6급 주사 등 4명으로 구성됐다. 낮에는 쉬고, 밤에 일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사적인 자리에서 이뤄진 대화 내용이 도청에 걸리면 여과 없이 보고서에 포함되기 때문에 고위층 인사가 갑자기 낙마하는 일이 생겼다.

이 직원은 “정권 최고위층 관계자가 동문회 자리에서 정권 핵심을 비난한 말이 문제가 돼 갑자기 자리에서 물러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미림 소속이던 직원 대부분은 현재도 국정원에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미림팀의 팀장을 지낸 C(퇴직) 씨는 “무모하게 정·재계 인사를 도청하지는 않았으며 1997년 대선 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 국정원 한 간부도 “미림은 그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나 때문에 활동이 재개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