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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경주박물관‘신라의 칼’展 계기로 본 칼의 모든 것

입력 | 2005-07-13 03:27:00


《칼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다. 칼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생존을 위한 투쟁, 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게 마련이다. 우리네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신석기시대 곡물의 이삭을 땄던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반달모양돌칼)부터 청동기시대의 청동검(靑銅劍), 장식이 화려한 삼국시대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자루칼), 날이 휘어 있는 조선시대 환도(環刀), 여인의 정절의 상징이었던 은장도(銀粧刀), 죄인을 처형하는데 사용했던 참도(斬刀)에 이르기까지…. 》

지금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신라시대 칼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왕권의 위세(威勢), 신라의 칼’전(10월 9일까지·월요일 휴관·054-740-7518).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봉황장식 대도(보물 621호)를 비롯해 황남대총, 금관총 등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화려한 칼 2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칼에 얽힌 이모저모를 들여다본다.

○도(刀)가 검(劍)을 이긴 까닭은?

칼은 도검(刀劍)으로 불렸다. 도는 외날 칼로, 베는 데 주로 사용됐다. 검은 양날 칼로, 찌르는데 주로 사용됐다. 양날의 검은 청동기시대부터 무기로 사용됐다. 청동검과 돌을 갈아 만든 마제석검(磨製石劍)이 대표적이다.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면 외날의 도가 양날의 검을 누르고 전투용 무기로 자리 잡았다. 찌르기도 하고 벨 수도 있는 양날 검이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전투에선 외날의 도가 훨씬 유리했기 때문. 기마병들에겐 달아나는 적병을 내려치는 것이 필요했고 거기엔 도가 제격이었다.

○무덤에서 화려한 칼이 나오는 까닭은?

도검은 무기일 뿐만 아니라 신분 또는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이었다. 청동기시대의 청동검과 삼국시대의 환두대도가 대표적인 예. 환두대도의 경우, 손잡이 끝 둥근 고리에 용 봉황 등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을 장식했고 손잡이는 금실 은실들을 감아 화려하게 꾸몄다. 이같은 신분과시용 도검은 대부분 무덤에서 발견된다. 환두대도는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 경주 천마총처럼 왕릉에서 주로 나왔다.

경주박물관의 유병하 학예연구실장은 “현세에서의 권위와 영화로운 삶이 내세에까지 이어지길 염원했던 왕족들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경주의 6세기 계림로 14호분에서는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부터 수입된 이국적인 모양의 보검이 나오기도 했다.

○조선 환도의 비애와 화려한 부활

조선시대의 대표적 전투용 칼은 날이 약간 휜 환도였다. 그러나 실은 활과 포(砲)에 밀려 보조 무기에 불과했다. 조선 전기엔 길이가 대개 50cm 내외여서 근접전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방어용 무기였다.

그러다 환도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변신한다. 왜군의 긴 칼에 대항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칼의 길이를 1m 내외로 늘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장검(보물 326호)이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조선의 환도다.

○12년 만에 하나 나오는 사인검(四寅劍)

조선시대엔 자(子·쥐) 축(丑 ·소) 인(寅 ·호랑이) 묘(卯·토끼) 등 12지가 겹치는 시간에 칼을 만들기도 했다. 인(寅)이 네 번 중복되는 인년(寅年) 인월 인일 인시(오전 3∼5시)에 만든 사인검(四寅劍)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인검을 만들 수 있는 시기(연월일시 간지가 모두 인인 때)는 12년에 한 번 돌아온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칼이 사악함과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