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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

입력 | 2005-06-11 03:27:00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엘스베트 볼프하임 지음·이현정 옮김/203쪽·1만 원·아카넷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는 ‘혁명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러시아혁명이 배출한 최고의 시인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1898∼1948)은 ‘전함 포템킨’으로 오락거리였던 영화를 혁명의 언어로 빚어낸 러시아 최고의 영화감독이다.

이 책은 러시아혁명이 탄생시킨 두 명의 천재예술가의 삶을 병치시킨 ‘듀오그래피(duo+biography)’라는 형식으로 둘의 예술과 인생을 비교한다. 그럼으로써 개인적 우상화와 거리를 두면서 전혀 다른 조건에서 혁명을 통해 발아된 두 명의 천재가 거의 유사하게 스러져 가게 만든 혁명의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다섯 살의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은 외모는 물론 삶의 환경도 달랐다. 큰 키에 당당한 체구의 마야코프스키는 13세에 아버지가 급사(急死)해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그는 열다섯 살에 이미 소련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 될 만큼 반항아가 됐고 혁명 전 두 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작고 통통한 몸매의 에이젠슈테인은 권위적인 아버지와 방탕한 어머니 사이의 유복한 집안에서 웅크린 채 곱게 성장한 ‘범생이’였다. 그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박식했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토목공학도로 성장해 러시아혁명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천재성을 발현한다. 마야코프스키는 10대 때 차르 체제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읽으면서 “그것은 혁명이었다. 그것은 시였다. 혁명과 시는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녹아들었다”고 말했다. 에이젠슈테인은 “혁명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었다. 혁명이 나를 예술가로 만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혁명기에 미대에 들어간 마야코프스키는 대중을 계몽할 연극에 심취하면서 자신의 혀가 혁명의 불꽃을 피워내는 부싯돌임을 발견한다. 역시 혁명 기간 미술을 배우며 연극계에 뛰어든 에이젠슈테인은 부분으로 전체를 포착하는 몽타주 기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나’의 발견이었다. 그들이 남긴 자서전이 ‘나 자신’과 ‘나’였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것은 또한 비극의 출발이었다. 그들은 러시아혁명이 성취한 최고의 예술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분출하는 개성은 혁명의 이념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둘은 소련의 선전선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으나 끊임없는 검열과 감시에 시달렸다. 그들의 삶은 ‘혁명이념의 위배’ 그 이상이었다. 마야코프스키는 비밀기관 요원이자 유부녀였던 릴리 브릭에 빠져 그 부부와 한집에 동거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당시 소련에서는 중죄였던 동성애자였으며 가학·피학증 환자였다. 두 사람은 끝까지 공산당원이 되질 않았다.

결국 마야코프스키는 ‘비열하고 남루한 현실’에 절망해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에이젠슈테인은 ‘시대와의 불화와 쏟아지는 비난’으로 자신의 심장을 혹사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자살을 준비해 50세에 숨진다. 그들의 비극적 삶이야말로 권력에 의해 절취된 혁명의 죽음을 묵묵히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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