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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간호섭]산업에 ‘문화의 옷’ 입히자

입력 | 2005-04-11 18:06:00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1960, 70년대 먹고사는 것이 시급했던 때에 어울리는 근사한 문구였다. 이때의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지금의 참살이(웰빙·well-being)와는 사뭇 달랐다. 모든 것이 모자랐던 시절, 우유 한 병, 크림빵 한 봉지가 배부름의 만족을 주어야 했다.

패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 한 번으로 최신 컬렉션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수많은 패션 잡지가 발행되고 세계 유명 브랜드의 제품을 현지와 다름없이 구입하리라고는 꿈도 꾸기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는 극히 제한된 경로로 패션에 대한 갈증을 풀어야 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잡지 보그(Vogue)나 바자(Bazaar)는 진흙 속에 감춰진 진주였고 세운상가에서 불법 복제된 레코드판 앨범 재킷의 가수들 사진이 곧 패션화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방대한 패션정보의 물결에서 정체성을 찾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진 것은 아닐까.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유럽 유명 브랜드들의 수석 디자이너 교체는 비단 패션계뿐 아니라 많은 유럽인에게 큰 충격이었다. 구찌와 루이비통이 미국 출신의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했고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지방시가 영국 출신의 존 갈리아노와 알렉산더 매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들 브랜드는 유럽인의 자존심이자 그 나라를 나타내는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단순한 수석 디자이너 교체를 넘어 외국인들에게 그들의 혼을 내준 사건으로까지 치부됐다. 하지만 그들은 왜 그런 비난을 무릅쓰고까지 모험을 감행했을까. 세상이 변했고, 또 더 빠르게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이런 패션계의 지각변동은 더욱 다양하고 활발해지고 있다. 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가 독일의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와 손잡고 Y’s란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메이드 인 차이나’로 생산하고 있다. 그것도 매우 고가로 말이다. 이제는 국적도 생산기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구찌나 디오르 같은 브랜드들이 리노베이션할 수 있었던 기반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문화적 토대다. 건물로 치면 다 없애고 새롭게 짓는 재개발이 아니라 좋은 골조를 기반으로 리노베이션을 한 것이었다.

포드는 그 기반 위에서 구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갈리아노는 디오르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가치를 현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지의 스니커스는 아디다스 고유의 삼색선을 살리면서도 왠지 일본 사무라이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제 우리도 문화의 갑옷으로 우리를 무장해야 한다. 우리가 앞서 찾아 헤매던 정체성은 우리의 문화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온돌방에 자며 한복을 입고 가마솥에 밥해 먹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우리의 몫은 바로 과거의 전통을 우리 시대의 정신으로 재해석하고 또 후세가 그것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넘겨주는 것일 게다.

이달 초 필자는 베이징에서 열렸던 중국국제복장복식박람회에 참가했다. 질적 수준은 아직 밀라노나 파리보다 뒤져 있지만 규모면에서는 아시아에서 홍콩을 이미 제쳤고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만리장성의 웅장함과 쯔진청(紫禁城)의 화려함과는 다른 새롭게 태어나는 중국의 문화를 보는 듯했다.

패션이건 영화이건 자동차건 그 무엇이건, 문화라는 큰 그릇에 우리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담아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경계가 없어진 세계에서 ‘문화는 곧 국력’이다.

간호섭 홍익대 교수·패션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