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미진 씨가 26일 젊은 작가 10여 명과 함께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을 찾아 매화나무 꽃그늘 아래서 문학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진 제공 이룸출판사
매화마을(전남 광양시)로 꽃구경 갈래요?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에 가슴이 설레었다. 매화. 꽃구경. 이보다 더 화사한 말이 어디 또 있겠는가. 쓰다 만 원고도 덮어두고 잡다한 일상사도 내버려둔 채 무작정 따라나서기로 했다.
금요일 밤이었다. 모 출판사에서 대절한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소설책이 안 팔려 죽을 맛이라며 고개를 젓던 편집인은 소설가들이 갑자기 독도로 몰려가는 바람에 예상보다 인원이 줄었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래도 독도보다는 매화마을까지의 길이 멀미가 덜할 것 같은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무슨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난 정말로 멀미가 심한 편이다.
버스가 경남 하동에 도착한 것은 오전 1시가 넘어서였다. 아무리 늦었어도 한잔씩 걸쳐야 한다면서 죽 둘러앉았다. 서울서부터 지고 온 마른안주 몇 가지와 삶은 라면 한 솥, 맥주와 소주병들이 이 밤의 성찬이었다. 평론가 박철화는 “새벽 2시 반에 술상 펴고 앉기는 처음”이라며 좋아라했다.
사실 젊은 작가들은 고민이 많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펜보다 강한 것은 늘 엄혹한 현실 아니던가. ‘뭘 써야 하나’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그런 문제들은 제쳐 두고라도 글을 써놓고도 발표할 지면이 없는 형편의 작가들은 여기저기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동업자들끼리 통하는 구석이 있어 마음만은 편했다.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이러다 꽃구경이고 뭐고 없겠다 싶어 잠자리 속으로 파고들었는데 소란한 인기척에 눈을 뜨고 보니 창밖으로 펼쳐진 하동호의 푸른 물결이 장관이었다.
남도의 시린 물빛을 안고 매화마을이 있는 광양에 도착했다. 뜨문뜨문 보이던 매화나무들이 어느새 하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아 가는 산 중턱에 펼쳐진 백매와 홍매. 바람결에 뚝뚝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누군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이 악마 같은 세상, 매화향기조차 없이 어찌 살아갈꼬!
한겨울 서리와 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에 고운 꽃을 피워 내는 매화. 그 불굴의 생명력과 때 묻지 않은 자태에는 농염한 백화와는 달리 세속을 초월한 신비감이 어려 있다. 예로부터 문인 문객들이 매화시를 읊고 매화의 화목을 즐겨 다뤄 온 것도 그 곧은 절개와 선구자적 정신을 자아의 표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매화향기 그윽한 정취 속을 거닐다보니 전업작가의 초조함과 서러움이 철없는 망상처럼 느껴졌다. 혹자는 소설의 죽음을 논하지만, 소멸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는 것 또한 소설가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꽃구경을 위해 길을 떠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이나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들도 오다가다 운이 좋아서 구경한 것에 불과했다. 요즘처럼 어려울 때 부담 없이 꽃구경에 따라나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질 일이다. 소설가가 되길 정말 잘했군!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쩌겠는가.
소설가 김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