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많이 줄었죠. 사실 저도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고속철을 이용하는데 제 회사가 잘되겠습니까. 허허허.”(대전의 한 고속버스회사 대표) 고속철 개통 1년. 엄청난 속도혁명은 산업과 지역 판도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업종별, 지역별로 엇갈리는 희비(喜悲)의 현장을 살펴본다.》
◆ 천안-대구 등 역세권 부동산값 ‘쑥’
충남 금산군의 한 골프장은 최근 대전역에서 골프장까지 20여 km 구간을 오가는 고급 미니버스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고속철을 타고 당일치기 골프를 치러 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 고객이 늘자 할인제도를 대폭 축소했는데도 골프장 회원권 가격은 계속 오름세를 타고 있다.
전국의 고속철 역 주변은 ‘KTX 경제특구’라 불릴 만큼 새로운 경제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북 익산시 익산산업단지의 경우 고속철 개통 이후 수도권 기업 입주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에만도 22개 업체가 1068억 원 규모의 추가 투자계획을 세웠다. 익산시는 적어도 1800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속철 역사 인근인 충남 아산시 탕정지구는 삼성전자 LCD공장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개념의 산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곳에는 2010년까지 20조 원이 투입되며 10만 명의 이주가 예상된다.
고속철 역이 있는 지역의 부동산 값은 꾸준히 상승세다. 고속철 개통과 수도권 전철의 연장 개통이라는 양 날개를 단 충남 천안시의 올해 1월 땅값 상승률은 전월 대비 0.808%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특히 서울에서 신선(新線·고속철 전용선로)이 깔린 대구는 최대 수혜지역으로 꼽힌다. 동대구역의 고속철 이용 승객은 하루 평균 1만2028명.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어났다. 지난해 대구시내 호텔을 이용한 외국인 관광객은 11만3142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34.2% 증가했다.
◆ 지방 병원-항공-고속버스 고객 ‘뚝’
고속철 개통으로 지방 공항과 항공사는 그야말로 된서리를 맞았다.
대구공항의 경우 고속철 개통 이전에 하루 14편을 운항했으나 최근 항공기 이용객이 고속철로 이동하면서 승객이 급감해 현재 4편만 운항 중이다. 지방의 백화점 등 유통업체와 대형 병원 등에도 고속철은 복병(伏兵)으로 다가왔다.
충남 천안시내 G백화점은 “기존 고객의 20% 정도가 서울로 빠져나간 것 같다”며 “유출을 막기 위해 명품관 등을 새로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의 대형 병원들도 전국 차원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경쟁력 강화에 진력하고 있다.
경북대병원 관계자는 “이번 주 초 대당 25억 원이나 하는 양성자방출 단층촬영기를 도입하는 등 고객들의 수도권 유출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버스 회사들은 고속철 막차 시간 이후의 심야버스 운행과 고급화로 승부를 걸고 있으나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지역적으로도 만족도가 다르다. 호남권에선 고속철 개통이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만 불러왔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서대전역부터 광주, 목포로 이어지는 호남선 고속철의 평균 속도가 시속 130km 안팎에 그치기 때문. ‘호남선 저속철’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대전=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광주=김 권 기자 goqud@donga.com
대구=정용균 기자 cavatina@donga.com
▼아세요? 고속철 신조어▼
“‘KTX 풀(pool)’ 파트너 찾습니다.”
올해 설 때 국내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대학의 홈페이지에 ‘KTX 풀’을 찾는 글이 많이 올랐다. 이는 고속철도(KTX) 한 칸에 2개씩 마련된 4인용 테이블 석을 공동 구매하자는 것. 이 좌석의 할인율은 37.5%로 서울∼부산의 경우 운임이 정상요금(4만5000원)보다 1만6875원 저렴하다.
‘서울시 천안구’라는 말도 요즘 많이 쓰인다. 서울과 천안·아산역 운행시간이 30분대로 분당신도시(경기 성남시 분당구)보다도 서울로의 통학·통근 시간이 짧다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달리는 지구촌’이라는 말도 생겼다. KTX 특실에 외국인 승객이 많기 때문. 한국철도공사의 조사 결과 지난 1년 동안 특실 승객 중 5%가량이 외국인이었다. KTX 덕분에 ‘주말부부’를 탈출한 가족을 지칭하는 ‘평일부부’라는 말도 등장했다.
대전=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