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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서울의 대통령, 충청의 총리

입력 | 2005-03-23 18:43:00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한 뒤 대통령 박정희는 수도 서울이 휴전선에서 너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평양은 150km나 떨어져 있는데 서울은 작전종심(作戰縱深)이 고작 40km라니. 김일성이 기습공격이라도 감행하는 날에는 적의 탱크가 한 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닌가. 1972년 ‘10월 유신(維新)’으로 국내 통치의 안정성을 강화했다지만 서울의 안보 취약성은 별개 문제였다.

박정희는 1978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임시행정수도 건설 문제’를 꺼냈다. 인구는 50만∼100만 명, 서울에서 고속도로나 전철로 2시간 내에 오갈 수 있는 곳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의 임시 수도…. 1979년 10·26사태 직후 대통령 집무실에서 발견됐다는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白紙)계획’은 그 구체적 내용을 담은 보고서다.

백지상태에서 구상한다던 ‘백지계획’이 박정희의 죽음으로 백지화되고 23년이 지난 2002년 대선. 여당 후보 노무현은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안보 차원에서 수년 동안 고심했던 것에 비한다면 다분히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해 급조된 공약의 성격이 짙었다. 노 대통령도 그제 “행정수도 이전을 생각하게 된 것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난 후의 일”이라고 밝혀 공약이 서둘러 마련된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재미 좀 봤다”▼

물론 모든 선거공약은 그 자체로 정치적 성격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같은, 이념의 문제가 아닌 생활의 문제는 되도록 정치색을 배제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아예 까놓고 말했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대선에서 “재미 좀 봤다”고.

“재미 좀 봤다”는 대통령의 직설(直說)은 장기적인 국토계획의 그림 아래서 차분하게 접근해도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행정수도 논란을 단번에 정치화했다. 더구나 행정수도가 사실상의 천도(遷都)로 변질되고, 대통령이 그것에 ‘지배세력의 변화’란 이념적 가치까지 부여하면서 사회세력 간 적대(敵對)의 갈등으로 증폭됐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는 수도 이전은 위헌(違憲)이라고 결정했다. 충청권이 들끓었다. 그러자 여당은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을 내놓았고,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를 엄호한 영남권 의원 및 측근을 중심으로 3월 2일 국회에서 특별법을 통과시켜 주었다. 그들 역시 ‘충청표’가 다 달아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부는 3월 18일 특별법을 공포했다. 절차로 보면 끝난 일이다. 그대로라면 7년 후에는 ‘서울 대통령, 충청 총리’ 시대가 열릴 것이다. 다시 위헌 소송을 한다지만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 등이 서울에 남는다고 하는 데야 헌재가 계속 위헌이라고 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러나 과연 끝난 일인가.

행정수도법에 반대하는 만만치 않은 움직임 때문만은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어떻게 위헌 소지를 피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이 ‘무엇을 위한 행정수도인가’라는 목적을 압도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2007년 대선이라는 정치시간표에 맞추는 데 급급해 정작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이란 근본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수도권의 여당 지지율이 급락하자 허겁지겁 내놓은 ‘수도권 발전 방안’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충청표도 얻고 수도권표도 지켜야 한다는 눈에 빤히 보이는 정략을 깔고서야 국가 백년대계를 입에 올릴 수 없는 일이다.

▼끝난 일 아니다▼

‘수도 분할’에 반대해 의원직을 던진 박세일 한나라당 의원은 “반쪽 수도 이전은 반드시 큰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엄청난 행정의 비효율과 낭비, 국민의 불편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혼란, 경제적 비효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구체적 정책으로 제시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행정수도는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나라를 또다시 분열과 대립의 재앙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결코 끝난 일이 아니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