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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3-23 18:34:00

그림 박순철


위(魏)와 대(代)를 평정한 한신이 장이와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로 내려온다는 소문은 조왕(趙王) 헐(歇)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에 그들은 대나라에서 조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는 정형(井형)길 조나라 쪽 어귀에 군사를 모아놓고 기다렸다. 조나라의 젊고 날랜 장정은 다 끌어내다시피 하여 만든 20만 대군이었다.

정형은 지금의 산서(山西)지방에서 하북(河北)평야로 나오는 길목에 있는 땅 이름이다. 조나라와 연나라에서는 산등허리를 형(형)이라 했는데, 그런 높은 산등허리로 둘러싸인 분지(盆地)가 마치 우물[정]같다 하여 정형(井형)이라 불렀다. 그 사이에 난 좁고 험하기로 이름난 길이 이른바 ‘정형의 길(井형道)’로서, 당시로는 대나라에서 조나라로 드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그 정형길이 조나라로 들어와서 끝나는 곳이 정형구(井형口)인데, 뒷날 그곳에 관을 쌓아 토문관(土門關)이라 불렀다. 그 정형구를 지나면 저수((저,지,치)水)가 황토고원을 가르며 흐르고, 건너편으로는 정형 읍성(邑城)이 나온다. 조왕 헐과 성안군 진여는 바로 그 정형 읍성에 자리 잡고 대군을 풀어 정형구를 막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성안군 진여의 막하(幕下)에는 이좌거(李左車)란 사람이 빈객(賓客)으로 불려와 있었다. 이좌거는 광무군(廣武君)이라 불렸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밝고 헤아림이 깊기로 조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진여가 정형구에 대군을 펼쳐 한신을 기다리는 걸 보고 찾아가 말했다.

“들리는 바로 한나라 대장군 한신은 남이 예상치 못한 길로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 표를 사로잡고, 하열을 사로잡아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였다 합니다. 이번에는 장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 조나라를 치려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나라를 떠나 먼 곳까지 와서 싸우는 그들의 날카로운 칼끝을 당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 천리 밖에서 군량을 보내면 군사들에게 주린 빛이 돌게 되며, 땔나무를 하고 마른 풀을 거두어야 밥을 지을 수 있으면 군사들은 배불리 먹어도 오래가지 않는다 합니다. 그런데 이제 저들이 오고 있는 정형은 길이 좁아 수레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으며, 기마대도 줄을 지어 지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좁고 험한 길이 수백 리에 이르니, 사세로 미루어보건대 적의 군량미는 틀림없이 뒤편에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제게 군사 3만만 빌려 주신다면 지름길로 달려가서 저들의 치중(輜重)을 끊어놓겠습니다.

그런 다음 물길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굳게 지키며 더불어 싸우지 않으신다면, 적은 나아가 싸울 수도 없고, 물러나려 해도 돌아갈 길이 없게 됩니다. 그때 다시 들판에 빼앗거나 거둬들일 곡식을 없애 버린다면, 열흘도 안돼 한신과 장이의 목을 휘하에 거두어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이 같은 제 계책을 써주시지 않는다면, 반드시 우리가 그들 둘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모진 세상을 떠돌며 시달려도 성안군은 원래가 유자(儒者)였다. 거기다가 오래 아비처럼 여겨온 장이를 암습(暗襲)하여 내쫓고 난 자격지심에서일까, 거느린 군사를 스스로 의병(義兵)이라 여기고 속임수와 별난 꾀[詐謀奇計]를 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정대하고 의로운 체 광무군에게 말하였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