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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데이트]이왈종 화백 ‘유쾌한 봄으로의 초대’

입력 | 2005-02-24 18:15:00

이왈종 화백의 좌우명 ‘중도’는 모든 것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는 포용의 철학이다. 상하좌우 원근까지 지우고 만물을 동등하게 배치한 화면에는 새 꽃 물고기 사슴 TV 골프채 자동차가 함께 뛰논다. ‘제주생활의 중도’(2002년). 사진 제공 갤러리 현대


이왈종 화백(61)은 스타가 많지 않은 한국 화단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기작가다. 더구나 인기품목에서 밀려난 지 오래인 한국화 분야에서 그의 존재는 값지다. 오랜만에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대형 개인전(3월3일∼20일)을 갖는 작가를 서울에서 만났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환갑에다 제주생활 15년을 결산하는 전시라 개인적으론 의미가 크다”고 털어놨다.

-환갑이라는 게 실감이 나세요.

“일단 기운이 빠져요(웃음). 패기도 예전 같지 않고…. 근데, 다 수용하는 자세가 되니까 맘이 편해요. 되는 게 절반, 안 되는 게 절반, 이러고 살아요.”

-아니, ‘되는 것’ 투성이인 선생님도 그런 생각을 하세요.

서영수 기자

“겉보기와 다르지. 그림도 농사나 똑 같아요. 어떤 때는 잘 되고 어떤 땐 안 되고. 그럴 땐 ‘욕심 부리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15년 전, 대학(추계예술대) 교수직을 버리고 불쑥 제주행을 택한 것은 요즘 말로 ‘올인’(다 걸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정말 버리니 얻어지던가요.

“잘 했지, 진짜 잘 했지.”

-그래도, 묶이는 게 편한 면이 있지 않았나요.

“반드시 좋지는 않았어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문득,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마음 속 깊이 아! 이런 거는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때(제주행)가 마흔 다섯이었는데, 건강도 많이 해쳤고 학교는 데모한다고 늘 어수선했고. 딱 5년 동안 그림만 그리다 죽어야지 하는 심정이었지.”

그는 “삶의 목표가 작을수록 성취감이 크다”는 역설적 이야기를 하면서 “내 목표는 출퇴근 안 하고 낮잠 실컷 자는 것이었는데, 이것만이라도 성공했으니 대단한거지” 하면서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이 화백의 생활은 권태와 고독 그 자체다. 그의 일상은 새벽 2시에 일어나 낮 12시까지 작업하고 점심 먹고 오후에 다시 작업하는 일의 반복이다. 그는 화단에서 사람 안 만나기로 유명하다. 유일하게 타인과의 대화시간인 ‘일주일에 두 번 골프 치는 일’은 건강유지를 위한 생존책이라고 했다.

“공기 좋은 제주에서 골프 치고 그림 그리니 상팔자라 하지만, 그림 팔아 세끼 밥 먹고 산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품이 조금이라도 부실하면 여지없이 안 팔려요. 무서워요. 작품이 좋아야 어떻게 알고들 찾아옵니다. 결국 최선을 다하는 도리밖에 없지요. 친구들이 전화해서 ‘뭐하냐?’고 물으면 난 ‘장사한다’고 해요. 화업(畵業)을 깎아 내리자는 게 아니라 그만큼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 자꾸 일깨우는 거지.”

-혼자 작업하다보면 대중적 감각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나요.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상관없어요. 오히려 대중만 생각하면 야합하게 됩니다. 대중 생각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세계에 충실하면 돼요. 그래야 독창성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 화백의 그림은 나이 들수록 매너리즘에 빠지는 대다수 화가들의 행로를 거슬러, 변신과 창의로 가득하다는 것이 화단의 평이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서귀포 생활의 중도(中道)’ 시리즈의 색과 선은 남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은 자신감이 넘쳐,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생동감을 얻게 한다. 그의 좌우명 ‘중도’는 모든 것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는 포용의 철학이다. 상하좌우 원근까지 지우고 만물을 동등하게 배치한 화면에는, 새 꽃 물고기 사슴 TV 골프채 자동차가 함께 뛰논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회화와 각종 부조, 입체물, 부조 판화, 50돈짜리 순금판에 양각한 춘화 등 다양한 작품들(60여점)은 그의 변신 의지와 노동량이 얼마나 크고 강한 지 짐작케 한다. 개인전을 기념해 발간한 대형 화첩을 뒤적이다 대형 도조(陶彫)작품 향로(香爐)가 보여 물었다.

“이번 전시에도 나오는데, 얼마 전 세상 떠난 친구가 편히 갔으면 해서 시작한거예요. 하다보니, 살면서 많은 번뇌를 안고 사는 우리들 심사도 평안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대요. 향 피어오르는 모습 보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곧 소멸할 우리 삶 같아요. 힘든 생이지만, 모두들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행복해졌으면 하는 맘에서 만들어 본 거지요.”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