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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권력 勞組’의 비극

입력 | 2005-01-31 17:54:00


이화수(李和洙·52) 한국노총 경기도지역본부 의장은 지난달 1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손학규(孫鶴圭) 경기지사를 단장으로 한 유럽 첨단기업 투자유치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지난해에도 그렇게 일본과 미국에 세 차례 다녀왔다. 그의 역할은 한국의 노동운동에 거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외국기업 측에 “노사(勞使) 협력에 문제가 없도록 앞장설 테니 믿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몸으로 때우는 일’이다. 그러나 손 지사는 이렇게 말한다.

“몸으로 때우는 게 아니죠. 저는 유치단을 소개할 때 항상 이 의장을 앞세웁니다. 이 의장이 협상 현장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투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공고를 졸업하고 1977년 평택의 한 제지회사 노동자로 출발한 이화수 씨는 1986년에 파업을 주도하는 등 ‘강성’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노총 산하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경기 남부 본부장(1996년)을 거쳐 2003년 경기도지역본부 의장이 됐다. 16개 지부 16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자리다.

▼“한국 노동운동 확 달라져야”▼

그의 ‘몸으로 때우는 일’이 어느 정도 효과를 봤는지는 계량할 수 없지만 경기도 투자유치단은 이번에 독일 벨기에 영국 스웨덴 프랑스를 돌며 7개 기업에서 2억 달러가 넘는 투자를 유치했다. 직간접적으로 2500여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과라고 한다.

“어용(御用) 소리를 듣지는 않느냐고요? 그런 데는 신경 안 씁니다. 경제를 살려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래야 실업자, 비정규직 문제도 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확 달라져야 합니다.”

1970년 스물둘의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은 살인적인 노동조건에 항의해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근로자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低賃) 구조를 기초로 한(또는 할 수밖에 없었던) 압축성장에서 희생되고 소외된 노동자의 현실을 죽음으로 고발한 이 사건은 권위주의체제 아래 잠복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반(反)체제적, 정치 투쟁적 성격을 강화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민주화운동과 직결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곧바로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진 것은 그런 맥락에서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에 따른 한국 노동운동의 승리가 곧 전체 노동자의 보다 나은 삶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95년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급속히 권력화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노동운동 권력화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노사정(勞使政)위원회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주체’였다. 서울지하철노조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배일도(裵一道) 한나라당 의원은 이렇게 지적한다.

“정부가 사회협약을 명분으로 노사정 합의라는 허구적인 틀을 유지하기 위해 10% 정도의 대표성밖에 갖지 않는 대기업 노조 세력을 파트너십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특권화하는 데 일조한 책임이 있다.”

물론 그들은 ‘주체’로서 외환위기 극복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권력화한 노동운동세력에서 ‘노동자 연대의 정신’은 실종됐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을 거부하는가 하면, 정규직 노조는 그것대로 여러 개의 계파로 나뉘어 반목한다. 그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자기 몫의 양보는 좀처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노조’인 것이다.

▼실종된 ‘노동자 연대의 정신’▼

최근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기아차 노조의 ‘취업 장사’는 권력화한 노조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일 뿐이다. 모든 대기업 노조가 그럴 만큼 부패했다고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파업을 무기로 경영에 부당하게 간섭하거나 압박하는 행위라고 크게 나을 것은 없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정말 확 달라져야 한다. 그러자면 권력화한 노동세력이 ‘그들만의 욕망’을 버리고 노사 공동의 과제 달성을 위해 노(勞)의 역할부터 충실히 해 내야 한다. 경기도의 성공 사례는 좋은 예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