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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을 빛낼 인물]한국현대사 재해석 서울대 박지향 교수

입력 | 2005-01-03 18:47:00

박지향 교수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사학자’를 꿈꾼다. 그는 인간의 삶은 칼로 무 자르듯이 흑백을 구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단히 혼란스럽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라고 강조한다. 신원건 기자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교양 필독서였다. ‘해전사’라고 불린 이 책을 읽은 학생들은 한국현대사가 초중고교에서 배운 것과 너무 다르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해전사를 탐독한 386세대 정치인들은 그 책의 인식 틀을 바탕으로 요즘 과거사 규명과 청산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학계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 해전사의 내용을 반박하거나 뒤집는 논문들이 쏟아졌다. 다만 일반인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지주에게만 이로웠다고 평가받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이 사실은 ‘북한의 토지개혁보다 나은 것’이라는 연구가 나왔고, 이광수나 서정주의 작품을 친일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 연구도 나왔다.

박지향(朴枝香·52·서양사학) 서울대 교수는 해전사가 과연 객관적 역사서술인지 오래전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다. 박 교수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해전사의 ‘재인식’을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런 의문을 학문적으로 풀기 위해서였다. 뜻을 같이 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공 교수들과 팀을 이뤄 1930∼50년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학 사회 분야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더한 논문들을 모아 4월 초 3권의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책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우리 책의 의도는 좌우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거예요. 그동안 한국 현대사를 보는 시각이나 학문적 성과들이 사실과 동떨어졌거나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었거든요. 절대 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변도 아니고 좌익 비판도 아닙니다.”

박 교수는 영국 근대사를 전공했지만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한국 현대사와 사회에 대한 발언을 계속해 왔다. 2003년에는 19세기 후반 영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일본의 근대를 냉정하게 비교한 ‘일그러진 근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그의 발언을 못마땅하게 보기도 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자신은 서양사학자도, 영국사학자도 아닌 ‘역사학자’라는 것이다.

“역사는 일직선이 아니라,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한 힘들이 작용하는 알기 힘든 현상이에요. 그런 모습을 될 수 있으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입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는 지난해 영국의 저명한 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을 장문석 박사(서울대 강사)와 함께 번역했고, 한 학회에서 ‘국사의 해체’를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세계화가 한창 진행 중인데도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가 역사의 주도세력이자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거기서 벗어나야지요.”

그가 지난해 말 국회에서 통과된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왜 개인이나 인류라는 개념보다 민족이 압도적이고 절대적 가치가 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 사회가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행태의 이면에는 역사 피해의식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고 진단한다.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책임을 남에게 미루려고 하는 측면이 강했어요. 무엇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면 정작 우리의 책임은 없어지고, 결국 역사에서 배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박 교수는 올해 하반기에는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중요한 시기인 1960, 70년대를 재평가하는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객관적이고 균형 있게 보여주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 해석에 대한 박 교수의 도전은 2005년에도 계속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