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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ight]3부이종수 사회연대은행 운영위원장

입력 | 2004-12-31 17:04:00

무담보 무보증 소액대출을 통해 저소득층의 자활을 돕는 사회연대은행의 이종수 운영위 원장이 사회연대은행의 지원을 받아 점포를 연 상점들의 이름이 적힌 패널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다. 박주일 기자


▼일상에서 나눔의 삶 솔선…‘노블레스 오블리주’ 조명▼

본보가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기획 보도한 ‘뉴 라이트 시리즈’를 계기로 불붙은 뉴 라이트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합리적 보수 세력이 더 이상 ‘말 없는 다수’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한 것이다.

본보는 1차 시리즈 ‘뉴 라이트-침묵에서 행동으로’(11월 8∼15일 게재)를 통해 사회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뉴 라이트의 태동 움직임과 배경을 중점 조명했다. 이어 2차 시리즈 ‘뉴 라이트-분열에서 통합으로’(12월 2∼8일 게재)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별로 뉴 라이트가 추구하는 가치의 핵심 내용을 짚었다.

1, 2차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된 의제는 ‘나눔의 실천’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이는 범(汎)보수층이 ‘개인적 이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공공의 의무’를 다하는 도덕성 회복이 바로 뉴 라이트 운동의 출발점이라는 자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05년 을유년과 함께 시작하는 3차 시리즈 ‘뉴 라이트-이렇게 실천한다’는 일상 생활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의 궤적을 찾아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들은 뉴 라이트 운동이 사회 현상으로 표면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제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몸을 던져온 사람이다. 이들이야말로 뉴 라이트의 선구자인 셈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의 행보는 개인적 선행과 미담의 차원을 넘어 한국사회 전체가 지향해야 할 발전 방향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조명 받을 만하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한국사회 양극단 잇는 징검다리 놓자”▼

“‘뉴 라이트’ 운동은 한국사회의 이념적 정치적 양극화를 막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제적 양극화의 모순을 치유하기 위한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연대은행의 이종수(李鍾洙·51) 운영위원장은 ‘뉴 라이트’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뉴 라이트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그는 젊은 시절 유신 독재의 성장일변도가 낳은 사회모순에 치열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엔 시장의 첨병으로 변신해 맹활약했다.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시장경제의 원칙을 이용해 시장경제의 환부(患部)를 치료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사회연대은행은 한국사회의 양극단에 있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같은 존재입니다. 뉴 라이트 운동도 단절되고 갈라진 계층을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 운동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삶에는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20세기 한국의 화두가 겹쳐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시장의 모순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반체제주의자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살이까지 했다. 그러나 6개월의 옥살이가 그를 바꿔놓았다. 그곳에서 밑바닥 인생들을 사귀면서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분노보다는 평범한 이웃의 훈훈한 사랑을 배웠다. 갈 곳이 없어 그의 철거민촌 집을 찾아온 감방 동기와 4년 반을 함께 살다가 장가를 보낼 정도였다.

“가난이 우리를 이어줬죠. 지금처럼 잘살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와 함께 살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오히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베풀 게 더 많다는 것을 그때의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는 이후 어려운 집안을 이끌어야 하는 장남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체이스맨해튼은행에 입사했다. 한국과 홍콩, 동남아 일대에서 재무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1990년대에는 진로그룹에 발탁돼 동남아본부장을 맡아 숨 가쁘게 성공의 길을 달렸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에게 두 번째 삶의 전기가 됐다. 대규모 구조조정 때 미련 없이 진로에 사표를 낸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을 돕기로 결심했다. 인도네시아 노동부의 농촌지역 빈민 직업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는 ‘빈자(貧者)들의 은행’으로 유명한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의 모델을 한국에 접목시킬 방안을 모색했다. 그 고민의 결과는 귀국하는 길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해 비슷한 구상을 하던 사회복지전문가들을 만난 것이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20년 동안 잘살았으니까,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 저처럼 사회의 모순에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해서 그는 2002년 12월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 대출)를 표방하며 창립된 사회연대은행의 주역이 됐다. 사회연대은행은 빈곤층에 무보증, 무담보로 저리의 사업자금을 대출해 주고, 사업 운용에 필요한 각종 교육과 사후관리까지 책임짐으로써 자력갱생의 기회를 제공하는 빈곤구제시스템.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낯설지만 유엔이 올해를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해’로 정할 정도로 빈곤퇴치를 위한 새 모델로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게임의 법칙’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점에서 ‘물고기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셈이다.

이 위원장은 은행과 기업에서 익힌 ‘물고기 잡는 법’을 살려 사회연대은행을 알찬 어장(漁場)으로 키워 가고 있다.

사업 첫해인 2003년 10억 원이었던 사회연대은행의 기금(38개 사업체)은 1년 만에 31억여 원(96개 사업체)으로 3배나 늘었다. 올해는 정부의 각종 사회복지기금 100억 원을 위탁받아 기금 총액이 131억 원(570개 사업체)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물론 기금 확보가 곧 사회연대은행의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 대출받은 업체들이 성공 궤도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사업이 착수된 지 2년밖에 안 된 만큼 아직은 섣부르게 단정할 수 없지만 유례없는 불황 속에서도 최소한 지금까지 사회연대은행의 지원을 받은 96개 사업체(176가구) 중 문을 닫은 곳은 한 곳도 없다.

정부가 10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의 운영을 민간기관인 사회연대은행에 위탁하기로 결정한 것도 사회연대은행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반영한다.

이 위원장은 뉴 라이트 운동이 ‘꼴통 보수’와 ‘꼴통 진보’의 이념적 양극단에 대한 비판을 넘어 사회통합을 위한 자기희생적 실천을 겸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를 위해 특히 가진 자와 기업 등 기득권층이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이 위원장은 역설했다.

“우리나라의 전체 기부금 중 개인이 내는 것은 20%에 불과합니다. 반면 미국과 유럽, 일본은 전체 기부금의 70%가 개인 기부입니다. 사회연대은행은 돈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성공한 인사들의 시간과 열정을 더 감사하게 받습니다.”

사회연대은행은 지금도 사업운영 상담을 해 줄 경영컨설턴트, 법률상담을 위한 법률가, 각종 회계 상담을 해 줄 회계사, 매장과 상품 디자인을 도와 줄 각종 디자이너 그리고 업종별 노하우를 전수해 줄 기업가의 자원봉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위원장은 뉴 라이트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나가면 사회연대은행에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도 늘어날 것이란 기대를 밝혔다. 사회연대은행 02-2274-963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종수 위원장은

△1954년 서울 출생

△1973년 서강대 경영학과 입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1979∼1985년 체이스맨해튼은행 서울지점 기획부장

△1985∼1994년 호주은행 서울, 홍콩, 자카르타지점 기획관리 및 재무이사

△1994∼1997년 진로그룹 상무·동남아본부장

△1997∼1998년 인도네시아 노동부 수석 컨설턴트

△1998∼2000년 금융 및 컨설팅 회사 대표

△2000∼2003년 연세대 사회복지학 석사

△2000년∼현재 에이온 코리아 부사장

△2002년∼현재 사회연대은행 상임이사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