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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대통령의 12월

입력 | 2004-12-06 18:28:00


2002년 12월 영남 출신의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이 DJ(김대중) 후임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轉機)’였음에 분명하다. 노무현의 승리는 1997년 12월 DJ가 사실상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를 이뤄 낸 것 이상의 전환적 의미를 갖는다.

DJ의 승리는 한국 민주주의가 헌정(憲政) 반세기 만에 절차적 완결성의 틀을 갖추게 되는 중요한 전기였다. 그러나 특정 지역을 권력 기반으로 하는 DJ의 가부장적(家父長的) 리더십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채워 나가는 것에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DJ 역시 YS(김영삼)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추구한 민주화 투사’였을지언정 민주주의가 내면화(內面化)된 정치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새삼스레 폄훼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의 민주주의 의식 또한 그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일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勝者의 혁명’에 도취된 권력▼

노무현의 승리는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충격’이었겠지만 시대의 변화 요구란 흐름에서 보면 그렇게 소스라칠 일은 아니었다. 비록 그 효과가 당장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호남의 권력 교배(交配)가 가져올 탈(脫)지역주의의 순기능 또한 긍정적 요소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386그룹’은 시대의 변화 요구를 ‘세상 뒤집기’로 잘못 읽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절반의 반대자를 설득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법치(法治)를 바탕으로 차분한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승자(勝者)의 혁명’에 도취되어 서툴고 조급하게 세상을 분열시켰다. 노 대통령이 당선 1주년인 지난해 12월 19일 밤 일단의 지지그룹에 했던 “시민혁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외침은 노 정권의 ‘세상 뒤집기’에 대한 열정과 집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대통령 탄핵사태는 무모한 열정을 식힐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국민이 안겨 준 ‘또 한번의 승리’를 여전히 잘못 해석했다. 국민은 힘을 실어 줄 테니 경제를 살리라고 했건만 그들은 ‘세상 뒤집기’를 추인(追認)받은 것으로 여긴 듯하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노 정권은 절대 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라는 ‘실제 문제(real issue)’보다는 혁명적 열정과 이념적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뒤집기’에 매달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라를 이렇게 끌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성장도, 분배도 아닌 가운데 빈부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민생은 절망에 빠져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정책실장이란 인사는 “일부 언론이 소설을 쓰며 참여정부를 왜곡하고 있다”고 투덜댄다. 집권 여당은 과반수 의석이 무너지기 전에 이른바 ‘4대 입법’을 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집토끼(핵심 지지세력)’도 놓친다고 조바심이다.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은 독선(獨善)의 개혁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다. 그 어떤 개혁도 ‘집토끼’만을 위한 것이라면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개혁을 빌미로 ‘세상 뒤집기’에 집착한 채 민생은 계속 뒷전에 미뤄 놓는다면 최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 뒤집기’에 매달린다면▼

민주주의란 한마디로 주인인 국민에게 권력이 봉사하는 것이다. 과거 독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이후 정부도 총론에서는 그럴듯했어도 각론에서는 민주적이지 못했다. 2년 전 12월 다수 국민은 그런 변화를 위해 젊은 지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노 정권에는 소수의 ‘집토끼’들만 남았다. 이는 정권 차원을 넘어 나라 전체의 불행 아닌가.

노 대통령은 어쩌다가 이런 비극을 초래했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해외 순방과 정상외교에서 트인 안목으로 ‘세상 뒤집기’가 과연 나라의 미래에 유용(有用)한 것인지, 그것에 매달린다면 임기가 끝나는 3년 뒤 12월, 대한민국은 어디쯤 있을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