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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⑩1차 전문가 좌담

입력 | 2004-10-24 18:08:00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왼쪽부터)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소련의 대 한반도 정책 변화와 김일성의 급부상 등을 주제로 좌담을 벌였다. -박주일기자


《이번 전문가 좌담에서는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 비밀지령’이 어떻게 시행됐는지, 김일성은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는지 등을 짚어본다. 한반도 분단과정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소련의 관련문서 공개 실태도 함께 점검한다.》

▽이정식 명예교수=9월 20일 스탈린 지령은 소련군 제25군 사령부에 내려갔다. 제25군 사령부가 이를 정책으로 구체화하려면 상당한 보조지령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과의 관계,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과의 관계정립 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보조지령이 연해주군관구와 모스크바 그리고 평양 사이에 자주 오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현수 교수=9월 20일 지령은 너무 간단해서 정치적 소양이 부족한 군인들이 바로 시행하기엔 문제가 많다고 본다. 그러나 10월 8일부터 열린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 기록엔 정치 경제 행정 문제에 대한 구체적 조치들이 보인다. 이 회의에서 연설한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제시한 시정방침도 구체적이었다. 20일 만에 이렇게 구체화되려면 보완 지시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관련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소련군은 평북을 점령한 뒤 처음엔 우익계통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치안유지를 계속 맡도록 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들고일어나니까 번복했다. 이런 것을 보면 세밀한 지시를 받지 못하고 진주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10월에 들어서 달라진 것이다.

▽전=9월까지는 (소련의 한반도정책) 가이드라인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모스크바에서 한반도정책 수립에 개입한 사람은 누구인가.

▽안드레이 란코프 초빙교수=이오시프 스탈린이 개입했을 것이다.

▽전=소련군은 운영방식이 독특하다. 전투와 군사교육을 담당하는 실무군인과 점령정책을 관할하는 정치군인이 따로 있다. 조만식이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고 묻자 치스차코프가 “난 잘 모른다, 내 뒤에 오는 정치위원에게 물어보시오”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치스차코프는 실무군인이었다. 소련군은 함경도에서 일본군에 일본행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라고 말했다가 좌파가 들고일어나니까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이=김일성이 평양에 들어오기 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면접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란코프=개인적으로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왔을 때 그를 최고책임자로 만든다는 사전계획은 없었다.

▽전=란코프 교수 말대로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 마스터플랜이 없었던 9월 20일 이전에 그러한 결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일성이 속했던 소련군) 88특별여단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6개 도, 85개 군, 7개 시에 설치된 소련군 경무사령부에서 통역을 하고 현지사정도 파악하기 위한 보조요원으로 출신지에 따라 배치됐다. 그래서 김일성과 최용건은 평양에, 김책은 함흥으로 갔다. 김일성은 너무 젊은 데다 영관장교도 아니어서 최고지도자로 내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련군정은 조만식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란코프=1946년 여름까지도 소련장교들은 연금상태인 조만식을 찾아가 설득했다. 북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제일 잘 대표하는 인물이 조만식이었다. 김일성을 선택한다는 구상은 1945년 10월 초순부터 조금씩 부상한 것 같다. 제25군 정치장교인 메클레르가 김일성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 소련군 출신인 데다 머리가 좋고 말도 잘했으니까.

▽전=1945년 10월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통해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확립하는 문제가 기정사실화되고 이를 지도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일성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그 무렵부터는 상황이 착착 맞아떨어진다.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끝난 10월 11일 미군연락장교가 소환되고, 13일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다. 그리고 14일 김일성이 평양에서 대중 앞에 등장한다.

▽전=88특별여단은 연해주군관구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김일성이 소련군 장성들의 신망을 얻은 점이 10월 급부상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와다 하루키(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88특별여단 유격대원들이 귀환하면서 조선공작단을 만들 때 그룹 지도자로 누구를 세울 것인가 논의한 뒤 김일성을 내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시절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무고하게 친일로 몰려 대대적으로 숙청당한 ‘민생단’ 사건 때도 살아남았다. 생존력과 순응력이 남다르다고 봐야 한다.

▽란코프=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88특별여단 출신만이 아니라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도 있었다. 88특별여단 출신은 미미한 존재였다. 또한 김일성은 다른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고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김일성파를 너무 높게 보는 것 같다.

▽이=북한정권 수립과정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련문서가 더 많이 공개돼야 한다.

▽전=러시아연방기록관리청 산하에 있는 중앙당문서보관소와 국립문서보관소 등은 거의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 자료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소련군정문서가 보관된 국방성문서보관소도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란코프=1997년 이후 자료열람이 어려워졌다.

▽전=국가기밀 보호를 이유로 소련문서의 공개절차가 몹시 까다로워졌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대통령에게서 6·25전쟁의 도발 책임이 북한이 있음을 보여주는 소련자료를 받아와 언론에 공개한 이후 한층 엄격해졌다. 북한정부가 “왜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공개하느냐, 우리도 소련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반발했기 때문이다.

▽란코프=전 교수 말처럼 북한은 정권의 역사와 관련된 논문이나 자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공식적인 북한역사관과 다르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러시아는 북한 관련 자료를 아예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전=30년이 지나면 외교문서를 공개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다. 미국이 우리 요청을 받아들여 6·25전쟁 중 미군의 양민학살 관련문서를 공개했듯이 러시아에도 계속 자료공개를 요청해야 한다.

▽이=소련 이야기를 하다보니 미국 이야기가 빠졌다. 미국에선 1942년부터 조선 문제가 나오고 신탁통치안이 등장했다. 1943년 카이로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스탈린과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는 중국이 자극한 측면이 있다.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자고 하면서, 소련에 조선인 병사 2개 연대가 조직돼 있어 조선 점령 때 활용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국에 준다. 그게 미국문서에선 2개 사단으로 변한다. 미국은 조선에 관심을 둔 중국과 소련의 충돌을 막기 위해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1945년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니까 미국의 관심은 소련을 어느 선에서 막느냐로 바뀐다. 문제는 미국 내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나 결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중국의 국공내전 때문에 주변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는 미국이 처음부터 남한에 단독정부를 만들어 북한을 점령하기 위한 정책을 세웠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자료를 찾아봐도 그런 증거가 없다.

▼좌담 참석자▼

-전현수 경북대 교수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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