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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그때 그시절엔]정은숙 대표 '이청준의 소설들'

입력 | 2004-10-17 18:20:00

이청준의 소설은 억압적인 1980년대를 살며 고뇌하던 젊은이들에게 지적인 숨구멍 역할을 했다. 소설가 이청준씨의 80년대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후반 나는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한마디로 무지하게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평균적인 고등학생이 그랬듯이 학교와 집을 쳇바퀴처럼 오가며 막연하게나마 뭔가를 쓰기는 써야 하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폭압적인 입시전쟁 속에서 그런 꿈이 가능할지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입시를 몇 달 앞둔 어느 날부턴가 나는 필시 입시가 주는 중압감과 그 반동 때문이었겠지만 두 사람의 우리 소설가에게 매혹되기 시작했다. 그 두 작가란 바로 이청준과 김승옥이었다. 비교적 조숙하다는 평을 듣는 나였음에도 그들의 소설은 이해는커녕 겨우 독해만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스럽게 수험생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나는 자꾸만 몰입해 갔다. 그 바람에 학교 성적은 급전직하, 급기야 집에서 불호령이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는 낯선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유난히 내가 다른 지방에서 온 유학생보다 더 부대낀다고 느꼈다. 연일 데모가 계속되는 학원, 뽀얀 먼지 사이로 날아오르는 돌멩이와 잡혀가는 학우들…. 오랜 권위주의 정권에 길들여져 자라온 나와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도, 그렇다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때 이청준의 문학을 다시 발견하게 됐다. 일몰 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일몰 후에는 기숙사에서 나와 친구들은 ‘당신들의 천국’과 ‘소문의 벽’, ‘예언자’, ‘이어도’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언어와 폭압적 지배의 문제를 그 특유의 알레고리 기법으로 그려 낸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은 우리 같은 회색분자들에게는 큰 인기였다. 이청준의 문학은 어쩌면 무력하고, 또 많은 부분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빠진 우리의 심성에 한 가닥 위안과 숨구멍이 되어 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촉발된 정치학도의 문학적 관심은 루카치와 잉게보르크 바흐만, T S 엘리엇을 거쳐 김현의 문학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제멋대로’의 유영(游泳)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내 시선은 이청준의 ‘눈길’에 와서 머물렀다.

그 후 선생을 직접 만나고, 그의 전집과 산문집을 만드는 자리에 서게 된 것도 1970, 80년대 정치적 상황과 그 응전으로서의 소설읽기, 개인적으로 그 내밀한 속앓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 정은숙 대표는?

△1962년 생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1985년 출판사 홍성사 입사. 이후 고려원, 세계사, 열림원 근무 △1992년 계간 ‘작가세계’에서 시인 등단 △2000년 ‘마음산책’ 출판사 설립 △저서로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 ‘나만의 것’, 산문집 ‘편집자 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