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북파 후예들의 모임인 ‘동일회’ 회원들이 13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한정식집 ‘은행나무집’에 모였다. 이들은 이 음식점에서만 50여년째 모임을 갖고 있다.-박영대기자
“간밤에 소리치며 내린 비로 꽃잎이/ 알알이 흩어져서 바람에 나부끼고/ 품 떠난 꽃잎을 뉘 하나 보아주나”
“어, 좋네.”
“그렇지!”
13일 낮 12시,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 머리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30여명 모였다. 그중 한 사람이 자작 시조를 낭송하자 참석자들은 저마다 맞장구를 쳤다. 매달 두 번째 화요일에 열리는 이 모임은 약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동일회(同一會·회장 송낙범)정기회. 1600년대 초에 결성된 뒤 18세기에 와서 최성대(崔成大), 임정(任珽), 허필(許필), 신경준(申景濬), 강세황(姜世晃), 성대중(成大中),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옥(李鈺) 등 많은 문장가를 배출한 소북파(小北派) 후손들의 모임이다.
조용히 시를 읊고 친목을 도모하던 이들은 2003년 ‘소북 문학사연구소’(소장 강경훈)를 세워 소북 문인들의 문집을 국역해 발간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은 그 첫 책인 ‘국역 후추집(後추集·강경훈 박용만 역주·이회문화사)’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후추 김신국(後추 金藎國·1572∼1657)은 선조와 광해군 때 활동했던 문인 겸 정치가로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질 무렵 소북의 영수를 지냈던 인물이다.
이들은 10년 계획으로 매년 2권씩 총 20권의 소북파 국역 문집을 내놓을 계획이다. 동시에 소북파 문학사를 정리해 3권 분량의 ‘소북 문학사’도 만들기로 하고 준비 중에 있다. 이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강경훈 소장은 “조선시대에는 사색당파별로 학문 연원은 물론, 삶의 모습까지 차별화됐기 때문에 문학 역시 당파별로 연구돼야만 우리 문학사가 올바르게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송낙범 회장은 소북파 후예들의 모임이 400년간 지속돼 온 데 대해 “1600년대 초부터 소북파의 가문들끼리 혼인으로 맺어져 왔기 때문에 끈끈한 유대감이 있다”고 말했다. ‘동일회’에 참석하는 소북파 후예들은 40대 후반부터 103세의 노인까지 중장년층과 노년층이 주를 이룬다.
젊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아 명맥이 끊길까 걱정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송 회장은 “400년 동안 늘 걱정해 온 일이지만 다들 나이가 들면 제 발로 찾아온다”며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대체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이 몰락한 뒤 소북도 서인과 남인에 흡수되며 맥이 거의 끊긴 것으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1657년 처음 만들어져 지금까지 계속 확대 발간돼 오고 있는 북인의 족보인 ‘북보(北譜)’를 보면 소북에서는 인조 이후 1910년까지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강노(姜/), 우의정을 지낸 임백경(任百經) 등 재상급 고위관직 40여명을 비롯해 4000여명의 문과 및 각급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럼에도 소북이 사라진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데 대해 강 소장은 “대북과는 결별했지만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대북세력과 같은 뿌리의 정파로서, 나라의 큰 의론이나 사화에 간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사에서도 소북인의 맥은 면면히 이어졌다. 유치송 전 헌정회장, 남덕우 강경식 전 부총리, LG그룹의 사주인 능성 구씨(綾城 具氏), OB그룹의 사주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등이 소북의 후예로 분류된다.
▼69개 가문 구성 北人분파… 광해군 즉위싸고 大北과 대립
소북은 1600년대 초 북인으로부터 분파된 28개 성, 69개 가문으로 구성된 정파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했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1550∼1608)이 사사(賜死)한 무신옥(戊申獄) 이후 광해군을 지원한 대북과 유영경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었다.
광해군과 함께 대북세력이 저지른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 등에 대해 북인에 뿌리를 둔 정파로서 일부분이나마 책임감을 가졌던 소북인들은 이후 벼슬에 나아가기는 하되 정치권력의 핵심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사는 행보로 반성했다. 이들의 성향은 1657년 소북파의 결성 당시 만들어진 ‘북보(北譜)’에 실린 ‘팔약조(八約條)’에 잘 드러난다.
첫째,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면 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
둘째, 노인이 되면 조용히 살면서 손자들을 가르친다.
셋째, 어릴 때는 문 닫고 독서에 전념한다.
넷째, 벼슬에 있을 때는 땅을 사서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
다섯째, 자녀들을 장가들이거나 시집보낼 때 상대편의 영화로움과 쇠락함을 가리지 않는다.
여섯째, 사사로이 있을 때는 국사(國事) 등 공적 발언을 삼간다.
일곱째, 이사할 때는 벌열(閥閱)들과 척신(戚臣)들이 사는 안국동 같은 곳으로는 가지 않는다.
여덟째, 비록 낙향할지라도 임금이 계신 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충청도 이남으로는 가지 않는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