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유일하게 수십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디스플레이(화면) 산업. 삼성과 LG는 액정화면(LCD)과 벽걸이TV용 화면인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이 황금산업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공격적인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 시장조사기관들은 올 하반기부터 LCD와 PDP 모두 공급 과잉에 접어들면서 가격이 급속하게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디스플레이 산업도 반도체처럼 침체기에 들어갈 때 심한 홍역을 앓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산업을 키우면서 1998년과 2001년 공급 과잉기에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시련을 겪었다. 그 결과 LG반도체는 현대에 합병됐고 후신인 하이닉스반도체 역시 은행관리를 받는 등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반도체와 비슷한 게임의 룰=디스플레이 산업은 메모리 반도체산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이면서 일정 시기마다 투자가 이루어져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기간이 드물다. 특히 LCD 수요는 반도체처럼 PC 교체 시기와 수요가 맞물리기 때문에 이른바 ‘크리스털 사이클’을 갖는다. 또 제품의 혁신이 빨라 재고를 쌓아둘 수 없기 때문에 공급 과잉기에는 가격이 급락한다.
LG경제연구원 배수한 책임연구원은 “디스플레이 산업은 이런 특성 때문에 투자의 타이밍이 중요하고 공급 과잉 시기 이른바 ‘죽음의 계곡’을 건너갈 수 있는 자본력과 선도적인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급 과잉의 징후=동원증권 민후식 연구원은 “PDP나 LCD는 최근 1년6개월 동안 가격 하락 없이 수요 초과 상태를 누려왔지만 서서히 공급 과잉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며 “수요자가 매달리던 상황에서 서서히 공급자들이 재고를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쓰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업체들의 투자에 맞서 LCD에서는 대만과 일본 업체들이, PDP에서는 일본 업체들이 맞대응하면서 나타난 것.
한국의 공격적 투자전략을 벤치마킹한 일본과 대만 업체들 역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공급 과잉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전철을 밟지 않는다=삼성과 LG는 공급 과잉 기간을 버티는 체력인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죽음의 계곡’을 건널 때는 자본력이 부족하거나 원가경쟁력이 없는 업체들부터 탈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한국 업체는 초기 메모리 반도체산업과 달리 일찍 원가경쟁력과 기술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공급 과잉 시기를 오히려 후발주자를 탈락시키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또 LCD는 PC 수요에 얽매인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수요처가 다양하고, PDP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만이 생산 및 공급의 가격결정력이 높기 때문에 반도체산업보다 생존이 쉽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우증권 정창원 연구위원은 “공급 과잉이 되면 한국의 디스플레이 산업의 이익률은 낮아지겠지만 힘든 시기에도 흑자를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허진석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