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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0년 제2차 동서독 정상회담

입력 | 2004-05-20 20:02:00


“그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가 없는 그가 무릎을 꿇었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묘역.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내리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허물어지듯 풀썩 꿇어앉았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씻을 수 없는 죄과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냉전의 긴장 속에 굳게 닫혀 있던 동유럽권의 빗장을 열고자 함이었다.

브란트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진정한 화해 없이는 동서독간 데탕트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소련이 버티는 한 동독은 변할 수 없다.”

나치스와 정면으로 투쟁했던 독일인이, 그 나치스를 대신해 무릎을 꿇은 감동적인 장면은 동방정책의 절정이었다. 유럽 현대사의 한 장이 넘어가는 상징적인 삽화였다.

동방정책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브란트는 서둘지 않았다. 환상도 갖지 않았다. 그는 ‘거짓된 희망’을 거듭 경고했다. 조금씩 가까워짐으로써 변화를 촉발한다!

1970년 3월과 5월, 동독과 서독에서 분단 4반세기 만에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렸으나 성과는 없었다.

야당은 그거 보란 듯이 비웃었다. 정상회담 이후 동독의 개혁은 지체됐고 동서독 관계가 오히려 후퇴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브란트가 이끌던 사민당 연립정부는 엄청난 시련에 부닥친다.

1971년 그는 동방정책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나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단 두 표 차로 아슬아슬하게 해임을 면한 브란트. 그는 이듬해 의회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던진다.

11월 치러진 재선거는 사민당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안겨주었으니,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방정책은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12월 동서독 상호간에 합법성을 인정하는 기본조약이 체결된다.

브란트는 그 얼마 뒤 ‘비서 간첩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했으나, 1990년 통일이 되었을 때 국민들은 브란트를 찾았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통일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헬무트 콜 총리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는다.

“내가 통일의 선봉장이라고? 내가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군가에 의해 등을 떼밀렸을 뿐이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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