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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워터게이트’ 청문회

입력 | 2004-05-16 18:30:00


“잉크를 배럴(약 159리터) 단위로 사는 사람들과는 싸우지 말라.”

잉크를 많이 쓰는 자(者), 말하자면 신문사하고는 싸우지 말라는 미국의 속담이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하차한 닉슨 대통령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언론을 혐오했다. 사갈시했다. “언론을 걷어차는 것은 예술이다.”

백악관 참모들이 만든 ‘적들의 명단’에는 언론인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자 존 미첼 법무장관은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사주인) 그레이엄의 젖꼭지를 빨래 짜는 기계에 집어넣겠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대통령 선거를 5개월 앞두고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건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닉슨은 60%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재선된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그 이듬해 5월 미 의회의 청문회가 시작되면서부터.

백악관의 대화록이 공개됐고,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닉슨의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그럼에도 닉슨은 사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흔히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로 칭송된다. 그 주역은 분명 자유언론과 비판정신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놈 촘스키는 색안경을 쓰고 본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단지 미국 지배계급 내부의 파워게임이었다는 것. “닉슨은 언론과 그 광고주로 대표되는 대자본가들, 미 지배계급의 핵심세력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몰락했다. 그뿐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후, 워싱턴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대통령의 그 어떤 사소한 실수와 거짓말도 용납되지 않았다. 대중은 두 눈을 부릅떴고 언론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크고 작은 비리에 ‘-게이트(gate)’가 붙여졌고 음모와 공작의 악취를 물씬 풍겼다.

클린턴을 탄핵으로 몰고 간 ‘지퍼 게이트’는 그 절정이다.

오랜 기간 워싱턴을 지배해 온 대화와 타협의 문화는 사라졌고, 모든 것은 정쟁(政爭)의 대상이 되었다. 닉슨이 남긴 ‘더러운 유산’이었다.

권력과 언론의 전쟁, 그 어둡고 긴 터널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극도의 불신과 냉소주의였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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