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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기자의 감성크로키]추억의 보물상자

입력 | 2004-05-13 16:10:00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집안의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웬만한 물건은 털어 내고 단순하게 살자는 어머니에 맞서 꼼꼼한 성격의 아버지는 그것들을 계속 간직하기를 고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나는 어머니 의견에 동조했다. 요즘 같이 아파트 평당 가격이 비싼 시절에는 과감히 버리는 것이 돈 버는 길이라고, 웰빙은 단순한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아내와 딸의 반대에 부닥친 아버지는 상심한 채 오래된 물건 꾸러미 상자들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머니와 내가 갖고 있던 기존의 웰빙 개념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 상자와도 같았다. 나의 사춘기 감수성이 가득한 일기장과 노트, 어릴 적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몰래 머리맡에 두고 간 너구리 인형, 복고풍 패션으로 손색없는 풍성한 실루엣의 옛날 어머니 치마….

아버지는 습기 때문에 눅눅해진 옛날 음악 테이프들을 꽤 오랫동안 햇볕에 말려 보관하기도 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학창시절 친구가 손수 녹음해 내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빛과 소금의 ‘오래된 친구’, 이은미의 ‘그댈 위한 이 노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굿바이’ 등을 적은 친구의 귀여운 필체가 반가웠다.

얼마 전 노트북컴퓨터와 승용차를 새 것으로 바꾸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10년 가까이 탄 빨간색 소형 승용차가 ‘중고’라는 이름으로 새 주인을 만나 총총 떠나갈 때 밀려들던 아쉬움, 오래된 컴퓨터에서 새 컴퓨터로 그대로 옮겨온 ‘즐겨찾기’ 인터넷 사이트가 새삼 일깨우는 나의 예전 관심사들은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인식시킨다.

노송으로 일본 법륭사 금당 등을 재건한 일본의 대목수 니시오카 쓰네카쓰는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이란 책에서 오래된 목재는 제멋대로의 성깔이 사라져 부드럽고 좋은 향기를 지닌 나무가 된다고 했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뻔한 오래된 음악 테이프를 들으며 출근해 사무실 책상 앞에 앉으니, 오랜만에 옛날 선배가 안부 전화를 걸어온다.

“요즘 통 연락이 없네. 별 일 없이 잘 지내는 거지? 그럼 수고하고.”

테크놀로지가 아무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쏟아낸다 할지라도 나는 오래된 것들을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그것은 패션으로서의 앤티크가 아닌, 일상의 고마운 나이테일 것이다.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