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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피플]‘하류인생’ 주연 조승우 “나, 이제 건달이야”

입력 | 2004-05-11 17:38:00

“니가 꽂은 칼 니가 뽑아.” 영화 ‘하류인생’에서 태웅(조승우)은 자신을 찌른 하준에게 이렇게 내뱉는다. 충무로가 주목해온 기대주 조승우는 거친 욕설과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액션으로 한남자의 인생 유전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강병기기자


지난해 3월 서울 한남동 태흥영화사 앞.

배우 조승우(24)는 차를 몰고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중 임권택 감독(68)과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66)이 길가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얼른 차를 세우고 내려 꾸벅 인사를 했다. 2년만의 만남이었다.

“승우야, 너 태권도 좀 배워라.” (임 감독)

“예?” (조승우)

그걸로 끝이었다. 임 감독의 입에는 다시 자물쇠가 채워졌고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얼마 뒤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고 조승우는 임 감독의 99번째 작품 ‘하류인생’(21일 개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7일 서울 세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승우는 “얼핏 들은 한 마디가 캐스팅 제안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출연한 ‘클래식’의 흥행 성공으로 20여 편의 시나리오가 들어왔지만 모두 뒷전으로 밀쳐놓았다.

● 평범한 얼굴에 숨어 있는 千의 얼굴

영화 ‘하류인생’은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현대사를 배경으로 권력에 기생한 채 살아가면서 인성(人性)마저 황폐해지는 남자, 태웅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임 감독은 2000년 ‘춘향뎐’을 만들 때부터 이미 조승우의 얼굴이 지닌 매력과 배우로서의 잠재력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줬다. 그때 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뎐’ 오디션에 앞서 손바닥만한 작은 사진을 봤는데 그 안에 이 도령 얼굴만 있는 게 아니야. 또 다른 얼굴이 보여. 이번에는 이 도령이지만 다음에는 ‘주먹’이야.”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일까. 하지만 어릴 때 눈이 컸다고 ‘주장’하는 조승우의 말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풍긴다.

“평범한 얼굴입니다. 배우 얼굴은 캔버스처럼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그런 면에서 좋은 얼굴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내재된 매력이 우러나오는 정우성씨 같은 얼굴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 밟아

그는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았지만 이 도령이 된 것은 큰 영광이자 고통이었다고 했다.

“차 대신 당나귀 타고, 에어컨 대신 부채질 하고, 구두 대신 고무신 신고…. ‘춘향뎐’이 끝나자 한동안 주변에서 저를 이런 눈초리로 쳐다보더군요.”

짧지 않은 슬럼프였고 시간이 필요했다. 2002년 ‘후 아 유’의 게임 기획자 형태와 ‘H’의 연쇄살인범 신현, 2003년 ‘클래식’에서 순애보의 주인공 준하를 만나고 나서야 ‘이도령’ 대신 ‘오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장이 인정한 이 젊은 배우는 ‘하류인생’에서 또 다시 독하게 변했다. 시늉이 아니라 주먹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액션은 물론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세월의 때가 묻으면서 갈수록 비루해지는 남자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액션 장면에서는 와이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쿠션이 있는 특수신발을 신고 가슴에 보호 장비를 한 채 진짜 때리고 맞았다.

● 주인공 최태웅은 임권택-이태원의 분신

극중 건달에서 발전해 영화제작과 군납 일을 하는 주인공 태웅은 임 감독과 이 사장의 분신(分身)이다. 조승우는 장면에 따라 ‘이건 감독님, 저건 사장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라는 감에 따라 ‘훈수’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태웅의 멜로에 애착을 느꼈어요. 태웅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지만 그래도 돌아갈 곳은 아내 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조승우는 아내 혜옥 역의 김민선에 대해 “크랭크인 이틀 전 모친상을 당한 김민선이 촬영장에 나타나 깜짝 놀랐다”며 “극중 혜옥처럼 김민선도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헌신적이고 강한 여성”이라고 덧붙였다.

조승우에게 ‘임 감독이 두 차례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춘향뎐’으로 생긴 어려운 ‘숙제’를 혼자 잘 풀었기 때문에 또 다른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100번째 작품에서는 카메오라도 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보여줄 게 너무 많다”는 그가 지금 꿈꾸는 것은 ‘스타’가 아니라 ‘배우’다. 조승우야말로 40여년 영화인생을 반추하면서 때로 “하류로 살았다”며 쓴 웃음을 짓는 한 거장이 한국 영화계에 보내는 ‘선물’이 아닐까.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