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5공(共)이 ‘정의사회 구현’을 소리 높이 외치던 1982년.
그해 5월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사건이라는 ‘이철희 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경남 의령군 궁유지서의 우범곤 순경이 카빈과 수류탄으로 주민 56명을 사살해 세상이 발칵 뒤집어진 지 바로 열흘 뒤의 일이다.
‘이장 부부’의 어음 사취금액은 1400억원. 어음발행 기업의 총피해액이 7000억원에 달했다.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군사정권의 폭압(暴壓) 아래 숨죽이던 시절이었으되.
민나 도로보데스! ‘모두가 도둑놈들’이라는 일본말이 크게 유행했다.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TV 드라마(‘거부실록’)에서 공주갑부 김갑순이 내뱉은 대사는 시대의 정곡을 찔렀다.
“더 큰손은 청와대의 안주인”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위층’의 얼굴이 벗겨진다. 안기부 차장에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희씨 부부 뒤에는 장씨의 형부이자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가 버티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의 수법은 단순했다.
자금난에 빠진 기업들에 현금을 대주고 빌려준 돈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은 뒤 ‘담보용’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융통했다. 장씨의 말 그대로 “경제는 유통”이었으니.
문제는 어음이 한 바퀴 돌았을 때다. 어음을 끊어준 기업은 부도를 내고 무너져 내렸다.
이장 부부는 사기죄의 법정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구속될 때부터 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장씨는 잊을 만하면 뉴스에 다시 등장한다.
1992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 채 2년이 못돼 사위인 탤런트 김주승씨가 운영하던 회사의 부도사건으로 구속됐다. 1998년 8·15특사 때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2000년 또다시 ‘구권화폐 사기극’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장씨는 마지막엔 DJ를 팔았는데 이런 식이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의 전 부인과 동서지간이니 청와대하고도 선이 닿는데, 누가 어찌하겠어요?”
두 번째 구속됐을 때는 정신감정을 받았다.
38세의 나이로 처음 쇠고랑을 찼던 장씨는 이제 차가운 감방에서 환갑을 맞았다. 대체 무엇이?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