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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포럼]정옥자/잃어버린 ‘광통교’를 찾자

입력 | 2004-03-14 19:00:00


1960년대부터 근대화라는 대명제 아래 비롯된 도시개발로 서울은 외형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잃었다. 우선 서울 한복판을 흐르던 청계천을 복개한 것은 서울의 삭막함을 부추기는 일차적 시행착오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곳곳에 흐르던 시내를 모조리 복개해 도로로 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삼청공원에서 흘러내리던 삼청동 길 시냇물이 어찌나 맑고 수량이 풍부했던지 빨래도 하고 여름밤이면 목욕도 했다. 그 아름답던 시내를 복개해 지금의 삼청동 길을 넓혔던 것이다.

▼조선 역사의 숨결 살아있는 곳 ▼

청계천은 인왕산의 옥류계와 북악산의 청풍계에서 발원해 서울의 정중앙으로 흘러내리면서 남산과 낙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내까지 합류시켜 오간수문으로 빠져나갔다. 바로 그 오간수문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세어 올라가 여섯 번째 다리가 광통교다. 이름의 유래는 광통방에 있어서 붙여진 것이지만 줄여서 광교라 하였고 여섯 번째라는 뜻으로 육교(六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은 조선시대 중인계층의 집중 거주지였다. 중인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양반도 상민도 아닌 중간계층이라는 계급 개념설이 우세하지만 서울의 중간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중인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중인들은 이곳에 모여 살며 그들만의 독특한 중인문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오늘날 각광받는 전문직 종사자들로 의관(醫官·의사), 역관(譯官·통역사) 이외에 산사(算士·회계사), 율사(律士·법조인), 화원(畵員·화가) 등과 일선 하급행정직을 망라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조대 인왕산의 옥류계에서 결사한 중인문학의 모체인 옥계시사의 동인들이 광통교에서 가을날 다리밟기를 하는 그림이 남아 있다. 19세기 말에는 중인시사의 중심이 인왕산에서 광통교, 즉 육교로 이전되어 육교시사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중인계층이 개화운동의 역군이 되면서 육교시사는 중인문학의 산실이자 개화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던 것이다.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공사를 진행하는 중에 바로 이 광통교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 석재의 아름다운 조각은 태종이 정동에 있던 정릉의 석재를 갖다 썼기에 당대 최고의 예술품일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향처(鄕妻·시골의 조강지처) 한씨 소생인 방원 등의 협조를 얻어 조선을 개국했지만 경처(京妻·서울의 새 부인) 강씨 소생인 방석을 왕위에 올리려다 아들간에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태종 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면서까지 아버지 태조의 역성혁명을 성공시켰고, 이복동생들을 제거하고 개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까지 숙청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러한 그가 도성 안에 있던 강씨의 능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면서 그 석재를 광통교에 가져다 써서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원래의 정릉이 태조의 사랑을 받던 강비의 능으로 최고의 석재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임을 상기해볼 때 경위야 어떻든 광통교를 이루는 석재들은 당대 최고의 조각품이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청계천 ‘역사’도 함께 복원해야 ▼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수표교를 멀찌감치 장충공원에 옮겨놓은 마당에 광통교만이라도 어떤 형태로든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청계천 복원이 기능성 내지 현대화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물의가 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줄기의 복원뿐만 아니라 생태환경의 복원도 생각해야 하고 역사 문화적 복원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설계변경을 통해 보완점을 찾아야 한다.

조선시대에도 청계천의 관리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다. 이를 확인하는 자료로서 1760년 영조 때 청계천의 준설공사를 완료하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그려놓은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서울대 규장각 소장)가 있다. 이를 참고해 앞으로 복원된 광통교에서 봄이면 준천행사를 재현하고 가을이면 다리밟기를 하는 것도 역사 문화적 의미를 살리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