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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영웅없는 시대의 영웅

입력 | 2004-02-25 19:15:00


지리멸렬의 세태 속에서 요즈음엔 황우석 교수팀의 얘기를 듣는 재미로 산다. 세계가 ‘놀라 까무러칠 정도의 성과’를 올려 한국을 일약 ‘과학국가’(디 차이트)로 격상시킨 인간배아 줄기세포 복제기술의 개가(凱歌). 그에 대해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로저 피터슨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면 21세기 한국에서는 생명공학혁명이 시작됐다”고.

뉴욕 타임스가 ‘세계 과학계를 뒤흔들었다’고 보도한 연구 성과를 미국에서 발표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황 교수가 적었다는 글도 가슴을 때린다. ‘우리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2010년쯤으로 예견된 생명공학의 고지(高地)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가는 길이다.’

▼황우석 교수팀의 생명공학혁명 ▼

그래, 그는 분명 한국인이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말과 같이 그는 한국의 과학자다. 그럼으로써 전쟁이나 쿠데타, 아니면 축구나 골프로 외국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한국이 돌연 문화·과학 뉴스의 발신지로 전 세계 권위지의 1면 머리에 부상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한국인일까. 머리만 좋다면 너도 나도 의대에 가려는 판에 성적이 뛰어나 의대에 진학하라 권해도 1, 2, 3지망을 모두 수의학과로 적은 고집쟁이. 직장을 얻게 되면 우선 아파트 평수 늘릴 궁리부터 하는 세상에 35평형 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서울대 교수. 30대의 회사 과장만 돼도 비즈니스석을 타려는 여객기에서 이코노미석만 고집하고, 미국 주최측이 특급호텔을 예약해 줘도 연구원들과 함께 있기 위해 50달러 미만의 허름한 모텔에 묵은 50대의 세계적 과학자.

아니 그보다도 요즘 말로 ‘얼짱’ ‘몸짱’이라면 방송 영화 광고회사가 앞 다투어 20, 30대의 젊은이에게 억대의 돈을 거침없이 주고 또 거침없이 받는 나라에서, 전 세계 과학자들이 “당신은 이제 돈방석에 앉게 됐다”고 축하해 주는 판에 엄청난 로열티 수입이 예상되는 국제특허의 지분을 본인은 한 푼도 받지 않고 60%는 대학에, 40%는 연구원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이 과연 오늘의 한국인일까.

그뿐 아니다. 주5일 근무제 도입의 시기를 둘러싸고 산업계에 먹구름이 다가오고, 청년실업 문제로 온 사회가 깊은 속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이른바 3D업종에 종사할 사람이 없어 수십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여 또 다른 홍역을 치르고 있는 나라에서 365일 달력에서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의 ‘3요일’을 없애버리고 소 돼지의 비명과 분뇨(糞尿) 냄새로 마비될 것 같은 3D환경 속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묻혀 연구하는 ‘일 중독자’가 오늘의 한국인이란 말인가.

황 교수만이 아니다. 그 못지않게 ‘이상한’ 한국인들이 또 있다. 훌륭한 팀워크의 소산인 이번 연구는 황우석, 문신용 박사 외에 한양대의 황윤영 박사, 미즈메디병원의 노성일 박사 등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언스’지에 등록할 저자 명단이 제한되자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업적의 논문에서 자기 이름을 빼 달라’고 해서 황 교수를 감동시킨 두 박사의 도량 큰 겸양과 자기희생. 도무지 어느 하나 현대 한국의 풍속도 같지가 않다.

▼우리 문화 '제3의 르네상스' 예고 ▼

이런 감회 속에서 나는 황 교수팀의 이번 개가를 통해 한국 문화의 제3의 르네상스를 고지하는 21세기의 가장 뚜렷한 고동 소리를 듣는 듯싶다. 문화의 중흥기는 15세기 세종 시대나 18세기 영·정조 시대 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도 항상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과학과 과학정신이 선도했다.

물론 황 교수팀이 개발한 인간배아 복제에 의한 줄기세포는 ‘생명의 시작에 인위적으로 관여하는 기술’로서 인간 생명에 대한 인공적 조작과 같은 여러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황 교수의 답변은 분명하다. “우리는 인간복제를 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다. 인간복제는 설령 신이 요구하더라도 거부할 것이다.”

21세기 한국 르네상스의 인간주의 정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있을까.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