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캠프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일지명상센터' 옆 언덕에 올라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동작을 연습하고 있다. 세도나=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네덜란드 태생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이본 케셀스(31·여)에게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삶은 “불운을 견디는 일”이었다. 실연으로 호된 좌절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고, 외과 치료를 받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가을 “가볍게 스트레칭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명상을 시작한 뒤 그의 삶은 달라졌다. 1일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의 ‘일지명상센터’에서 만난 그는 “이전엔 허리가 아파 1시간 이상 서있질 못했는데 지금은 4시간을 서있을 수 있다”고 한다. 더 큰 변화는 “물리적인 치료(Cure)가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된 치유(Heal)의 과정을 겪은 것”이다.
“감정은 몸에 쌓인다. 허리가 계속 아팠던 건 내 안의 나(Inner Self)가 자신을 보살펴 달라고 외친 것이 아니었을까.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고 내면에 몰두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고 평온해졌다.”
케셀스씨가 유별난 건 아니었다.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3일까지 세도나의 ‘일지명상센터’에서 한국의 단월드 주최로 열린 ‘지구인 청년연합’ 캠프. 한국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브라질에서 250여명이 모여든 이 명상 캠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명상을 통해 삶이 달라졌다” “나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단순히 동양적이고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정신집중과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명상을 실천하고 있었다. TV, 전화도 없고 온통 붉은 바위산 아래에서 명상에 빠져든 세계인들. 내면으로 떠난 그들의 여행에 동행했다.
●나를 찾아 떠나온 여행
미국 남서부 사막지대인 애리조나주 북쪽의 도시 세도나는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에너지가 강하게 분출된다고 알려져 정신수양을 추구하는 이들이 성지처럼 여기는 땅이다. 이곳의 코코니노 국유림 안으로 뻗은 비포장도로를 17km가량 달리면 붉은 바위산들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일지명상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열린 명상 캠프는 전 세계로 뻗어나간 한국의 단학을 수련하는 각국 청년들의 여러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마련된 행사. ‘지구인 청년연합’ 발대식과 함께 단전호흡 뇌호흡 단공수련 야외수련 등의 명상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눈감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모든 명상이 시작되기 전 다이내믹한 동작들을 하며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프로그램 초반에 진행된 ‘비전 검’ 수련. 과거의 자신을 떨쳐내고 원하는 자아상을 체감하기 위한 상상 수련이다. 목검을 잡기 전 2시간 넘게 진행된 고강도 근력 훈련을 견디기 어려운 모양인지 몇몇 사람들은 털썩 주저앉는다.
한국인 사범의 지도에 따라 참가자들은 절도 있는 목검 동작을 익힌 뒤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과거를 잘라내기라도 하듯 빈손으로 상상의 검을 내려치며 자신의 화두를 외치는 동작을 반복했다. 각기 다른 목소리로 터져 나오던 고함소리가 하나둘씩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참가자들 중에는 인생의 위기를 겪거나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다 마음공부의 방편으로 명상을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매사추세츠공대(MIT)에 재학 중인 루시 보겔(23·여)은 3년 전부터 단학 수련을 시작해 사범까지 된 경우. 그는 “운 좋게 재능을 많이 받고 태어나 늘 ‘잘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수련을 시작하면서 삶이 욕심과 감정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2년반 전부터 MIT에서 단학 서클을 운영하고 함께 단학 수련을 한 동료들과 함께 하버드, 보스턴, 라이스, 터프 대 등 동부지역 대학에서 명상 보급에 열중하고 있다.
명상 수련이 꼭 정적인 자세로 가부좌를 틀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예 동작과 검술 기법등을 활용해 고안된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수련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 세도나=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서구의 명상 붐
현재 미국에서는 바쁜 현대생활에서 벗어나 내면을 응시하는 명상이 급속히 대중화하고 있다. 10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정기적인 명상을 수행하고 있으며 학교 병원 정부기관 감옥에서까지 명상이 보편화하고 있다.
프로농구 LA레이커스의 필 잭슨 감독은 명상으로 선수들을 훈련시키며 미국육군사관학교는 명상을 수업과목의 하나로 채택했다. 아이오와주 패어필드의 마하리시 초등학교에서는 하루에 두 번 명상 시간이 마련돼 있다.
콜로라도 로키 산맥에서 티베트 불교식 명상을 수행하는 ‘삼발라’ 센터는 연간 방문객이 1998년 1342명에서 지난해 1만5000명으로 늘었다. 캘리포니아주 칼라바사스에서 하이킹과 요가 클래스를 겸하는 명상센터 ‘더 아쉬람’의 경우 1주일 참가비가 3500달러나 되는데도 대기자가 이미 6개월째 꽉 차 있을 정도다. 또 배우 리차드 기어, 골디 혼, 헤더 그레이엄과 전 부통령 앨 고어, 프로골퍼 비제이 싱 등은 잘 알려진 명상 예찬론자들.
단월드도 91년 미국에 첫 센터를 연 이래 현재 수련 센터가 70곳으로 늘었다. 이승헌 총재는 “단학수련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 젊은 서구인들의 호응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명상의 효과
명상의 원리는 호흡의 흐름에 집중하면서 다른 의식의 발생을 관조적으로 관찰하는 것. 이를 통해 더 깊은 의식상태의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대 감성신경과학연구소 리처드 데이비슨 박사는 기능성 자기공명 영상촬영 같은 분석기로 일반인 150명의 뇌와 명상중인 티베트 승려들의 뇌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대개 불쾌한 감정은 우측 전전두피질, 긍정적 감정은 좌측 전전두피질의 활성화와 관련돼 있는데 명상중인 승려의 뇌는 일반인보다 좌반구의 활동이 극단적으로 높았다고 한다.
명상이 두뇌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이미 MIT는 달라이 라마와의 공동 연구에 착수했고 단월드가 설립한 한국뇌과학 연구원도 UC 어바인 대학과 함께 지난해 4월부터 뇌의 초감각 인지능력을 실험하는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심리학계에서도 명상의 효과에 강조점이 두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의식의 중심인 자아(Ego)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을 통 틀은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Self)의 실현이 인간의 핵심적 과제”라면서 자기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도의 수련을 높이 평가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도 스테디셀러 ‘사랑의 기술’에서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 몰두하는 정신집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호흡을 느끼고 더 나아가 내 힘의 중심으로서 내 세계의 창조자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정신집중 훈련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자기와 대면하는 곳, 세도나
2, 3일 세도나의 명소인 벨 락과 캐시드럴 락에서 영험한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듯 야외 명상 수련이 진행됐다. 붉은 판형 구조의 바위가 겹겹이 쌓인 산을 집중해서 바라본 뒤 눈을 감고 “자연을 연주”하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방식이었다.
영국에서 온 샐리 머피(23·여)는 “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었는데 순환하는 거대한 에너지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 내 영혼을 대면한 느낌”이라면서 울먹였다.
캐나다에서 온 릴라 밸린트(17·여)는 “2주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인생은 짧으니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내가 살아야 할 방식임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며 “졸업하면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들의 말이 한편으론 낯설고 한편으론 믿기지 않았다. 그가 깨달았다는 자신은 진정한 자신일까. 혹시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집단의 암시가 개인에게 자아가 확장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기자의 냉소적인 생각은 명상이 끝나고도 눈물을 수습하지 못해 당황스러워 하던 누군가에게 옆 사람이 건넨 말을 듣고는 사라졌다.
“괜찮아요. (눈물은) 당신이 바라봐줘서 당신의 영혼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세도나=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