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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칼럼]세 겹의 反휴머니즘

입력 | 2003-11-26 18:04:00


‘휴머니즘’이란 말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로도 대충 세 가지 역어(譯語)가 있다. 인도(人道)주의, 인문(人文)주의, 그리고 인간(人間)주의. 현대 한국의 정치문화는 세 겹의 반(反)휴머니즘 현상을 심화시켜가고 있는 듯하다.

첫째, 반인도주의. 골치 아픈 철학적 윤리학적 개념인 ‘인도’란 말은 접어두자. 보다 손쉽게 인도를 ‘사람이 걷는 길’이라 풀이해 본다. 그러면 우리나라 도시 및 교통 행정의 반인도주의를 누구나 체감할 수 있다. 서울의 경우 수십리의 한강변 양편엔 자동차의 ‘고속’도로가 있을 뿐 보행자를 위한 프롬나드(산책)의 인도는 없다. 보행로가 없는 북악스카이웨이도 ‘차도’ 위주의 반‘인도’주의를 가시화한 악(惡)의 모범사례라 하겠다.

▼ 人道-人文-人間主義의 위기 ▼

둘째, 반인문주의.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나돈 지 오래다. 기초학문 중의 기초학문인 인문학이란 원래가 ‘제 밥벌이’를 못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은 나라가 육성시켜 온 것이 문명국의 상궤(常軌)다. 국가원수가 “무엇을 하건 돈 잘 버는 사람이 신지식인”이라 치켜세울 때 돈 못 버는 인문학이 기댈 벽은 무너져 버린다고 해서 잘못일까.

셋째, 반인간주의. 우리나라의 대북 대외 정책에는 ‘인간’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6·15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대통령과 각계 대표자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TV화면이 보여준 것은 ‘위대한 위원장 동무’와 그의 측근과 환영 군중의 ‘인파’뿐, 북한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1963년 12월 동서 베를린의 이산가족이 장벽을 넘어 상호 방문할 수 있도록 한 통행증 협상이 성사되자 이해 성탄절에만 서베를린 시민의 3분의 1인 80만명이 동베를린의 가족 친지들을 방문했다. “조용한 작은 행보(行步)의 정치가 떠들썩한 큰 소리의 정치보다 낫다”고 독일의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반대당의 당시 베를린 시장 브란트를 평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징소리 요란했던 햇볕정책으로 지난 5년 동안 수십만명의 남한 관광객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왔으나 막상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북한 사람의 수는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1500여명이 고작이다.

도대체 남북 화해는 왜 하자는 것인가. 사람이 아니라 금강산을, 백두산을 보기 위해서인가. 북한 땅은 그러한 명승지가 없더라도 우리와 같은 핏줄의 인간이 사는 곳은 아닌가. 우리가 특별히 잘나서 남쪽에, 그들이 특별히 못나서 북쪽에 사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의 정치적 세계관적 선택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사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운수팔자에 의해 광복 후 앉았던 자리에서 38선 저쪽으로 갈라져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의 모습이 남북의 화해나 협력 정책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면서 밤낮 ‘우리의 소원은 토오오옹일’은 왜 부르는지….

불법 입국자로 몰려 눌러 있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중국 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달라고 집단 단식한다는 소식엔 아무 힘도 주변머리도 없는 스스로의 무능에 울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중국 동포를 대하는 태도가 나았던 1995년 8월 15일, 나는 동아일보가 마련해 준 대담 자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들려준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광복 후 5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한 옌볜 동포가 한 달 후 김포공항을 떠나면서 “다시는 이 땅을 찾지 않을 것이며 이 땅을 나의 조국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동포애조차 사라져버리는가 ▼

옌볜이 어디며 중국 동포들이 누구인가. 그곳이 독립군의 활동무대가 아니었으며 그곳 동포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을 3D업종에 싼값으로 부려먹은 뒤 나 몰라라 하면서 ‘일송정 푸른 솔’은 무슨 입으로 부르는지….

우리의 의식 속에는 막연한 ‘인간’의 개념만이 아니라 끈끈한 ‘동포’의 감정조차 사라져버린 것인가. 외환위기 못지않은 불황이라면서도 각종 애완견 서비스 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니 이제 동물애(愛)로 인간애를 대신하는 또 다른 반휴머니즘의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일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