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수요프리즘]서병훈/부끄러운 줄만 알아도 좋겠다

입력 | 2003-11-18 18:30:00


어느 큰 교회의 목사가 정년을 몇 해 앞두고 미리 물러났다. 그리고 젊은 목사를 초빙했다. 교회도 젊음의 활력이 넘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직자이니 이 정도의 용단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있는 사람들이 더하고, 사회 지도층이라는 위인들이 더 욕심을 부리는 데 절망감을 느끼던 터라 적잖은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그 교회에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 ‘理想정치’까진 바라지도 않아 ▼

잘 한다고 소문난 음식점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아무리 외진 구석에 숨어 있어도 문제가 안 된다. 겉모양새가 허름하면 더 좋아한다. 인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자그만 선행을 하면 소문이 확 퍼진다. ‘아름다운 가게’가 그렇지 않은가.

세상이 삭막하다지만, 그에 비례해서 ‘의인’을 기다리는 심정도 절박해진다. 투자할 곳을 못 찾아 헤매는 뭉칫돈처럼, 우리네 마음도 이리저리 떠다닌다. 누군가 작은 불씨만 지피면 금방 타오를 기세다. 민심 잡기에 골몰하고, 국민의 지지도가 오르지 않는다고 안달이 난 정치인들이라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철인왕(Philosopher King)에 대해 크게 기대를 걸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지혜로운 철학자가 권력을 잡든지, 아니면 권력자가 철학을 공부해야 좋은 정치를 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지혜보다 더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치 지도자는 자기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국가를 위한 봉사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철인왕이라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욕심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플라톤은 최고 정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갖지 못하게 했다. 물욕 때문에 공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플라톤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철인왕은 아예 가족도 갖지 못하게 했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원천봉쇄한 셈이다. 이 바탕 위에서 철인왕이 소신껏 자기 포부를 펼치게 했다. 그래야 이상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정치인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수도승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무리다. 플라톤 자신도 나이가 들어서는 철인왕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 대신 현실에 맞는 정치인을 찾았다. 그러나 국사를 관장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욕심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바른 정치를 할 수가 없다. 국민의 앞장을 서기란 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플라톤이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기 단속’을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대통령의 재신임 논란이 대선자금 조사로 번지더니 이제는 특검으로까지 비화됐다. 그러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 밀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는지, 폭로에 폭로가 끊이지 않는다. 자고 나면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니 국민으로서는 정말 아침에 눈뜨기도 무서울 지경이다. 다 그러려니 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너무 심하다. 돈 먹었다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 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 잘못만 손가락질하는 작태가 더 문제인 것이다.

▼남의 탓보다 자기허물 돌아보길 ▼

올해도 학과 학생들이 ‘모의 국회’를 열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이 어찌나 심한지 옆에서 연극을 지켜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올해로 16년째인데 한번도 변함이 없다. 세상은 여전히 ‘전과 동(同)’인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또 있다. 학생들은 진흙탕 정치 속에서도 한 사람의 ‘의인’에 대한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올해는 ‘정바름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표를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동료 국회의원들 속에서 홀로 양심과 윤리를 지키다가 끝내 ‘왕따’를 당하고 만다. 학생들은 ‘정바름 의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의인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정바름’ 같은 사람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끄러운 줄만 알아도 좋겠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남 욕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 그 정도만 돼도 표를 몰아주고 싶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