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이미연이 이혼을 해?”
2000년 11월 배우 이미연이 남편 김승우와 이혼을 발표하자 위니아 만도는 발칵 뒤집혔다. 김치냉장고 시장을 두고 대기업들과 벌여온 치열한 전투가 이제 딤채의 승리로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딤채 CF모델 이미연. 귀여운 김승우와 고운 이미연의 예쁜 결혼 생활은 딤채의 이미지였다.
“공든 탑이 무너집니다. 광고를 내리고 손해배상도 청구해야 합니다.”
1997년 2만대 수준의 판매량은 그해 46만대로 늘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계속되는 대기업의 공세 속에 당장 내년 실적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끙’, 황한규 사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의 대답 때문에 회사는 한 번 더 뒤집혔다.
“그냥 갑시다. 이미연이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소?”
▽대역전극=이미연은 딤채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혼을 딛고 꿋꿋이 일어선 ‘강한 여자’라는 이미지가 영화 ‘흑수선’과 TV 드라마 ‘명성황후’로 이어지며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여자들은 이미연에 열광했고, 위니아만도에는 “이미연을 안 바꾸기 잘했다”는 소비자들의 격려전화가 빗발쳤다. ‘행복한 가정’의 딤채는 ‘당당한 여자’의 딤채로 바뀌었다.
‘이미연 효과’로 딤채는 2001년 68만대가 팔려나갔다. 작년에는 75만대가 팔렸고 전체시장은 160만대로 커지면서 김치냉장고는 이제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과 함께 5대 가전에 포함됐다.
상품기획자가 국문학과 교수와 술을 마시던 중 떠올린 브랜드 ‘딤채’(김치의 옛 이름)는 대기업들이 주름잡는 가전시장에서 이렇게 우뚝 섰다. “매출을 5배 이상 올려 줄 테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대기업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철저하게 자체브랜드를 고집하고 입소문에 의지하며,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의지를 이미연을 통해 보여준 결과였다.
▽제품 브랜드가 모든 걸 바꾼다=정보기술(IT), 가전업계에서 브랜드의 힘은 경쟁사를 시장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모토로라가 휴대전화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했다. 삼성전자는 점유율 10%대의 들러리였다. 94년 8월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내놓고 광고비도 기존 8억원에서 56억원으로 대폭 늘리자 변화는 시작됐다.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메시지로 94년 말 시장점유율이 30%로 올랐다. 95년 7월 애니콜은 점유율 52%로 모토로라(42%)를 눌렀다. 96년 애니콜이 안정적인 50%를 유지하는 동안 모토로라의 세력은 10%대로 줄어들었고, 97년 모토로라는 마침내 점유율 0%로 시장에서 퇴출됐다.
모토로라는 최근 ‘모토’ 시리즈를 새로 내놓으며 재기를 노리지만 삼성전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1998년 미국 스탠퍼드대는 애니콜의 브랜드 가치를 5244억원으로 계산했으며 작년 7월 한국생산성본부 조사 결과에서는 브랜드 가치가 2조380억원으로 뛰어 있었다.
▽설명 NO, 느낌 YES=1위 통신 업체 KT는 초고속 인터넷 분야에서는 후발주자다. 99년 두루넷 하나로통신이 ADSL 케이블망으로 초고속인터넷을 내놓은 뒤에도 ‘빠른 모뎀’격인 ISDN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끌려가듯 ‘한국통신 ADSL’을 내놓았지만 ISDN ADSL 등 생소한 용어 때문에 소비자들은 초고속인터넷을 거부했다. SDSL VDSL 휴대인터넷 FTTH 등 새로운 기술이 줄을 서서 시판을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매번 설명을 다시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2000년 5월 KT는 ‘메가패스’를 내놓았다. 광선이 하늘을 찌르고 이순신 장군이 ‘유쾌 상쾌 통쾌’를 외치는 광고로 이 브랜드는 단번에 소비자들의 호감을 샀다. 2001년 1월 4.5%였던 시장점유율은 11개월 뒤 44%가 돼 있었다. 현재 시장점유율은 50%. 선두주자였던 하나로통신 등은 뒤늦게 ‘하나포스’ ‘샤크’ 등의 브랜드를 내놓고 만회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친하게 지내자=SK텔레콤은 ‘늙은 브랜드’였다. 10∼20대는 016 019 등 요금이 싼 PCS를 주로 이용했고 이 연령대 SK텔레콤의 점유율은 20% 미만이었다. 아무리 요금이나 단말기를 싸게 해 줘도 이들 연령대는 SK텔레콤과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스무살의 011 TTL’이라는 감성광고로 언로(言路)가 트이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 젊은 층의 생활패턴에 맞춘 다양한 요금제가 먹혀들기 시작했고 이 연령대 점유율도 50%를 넘어섰다. 현재 TTL 가입자는 305만명.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회사가 유명하지 않아서, 제품이 나빠서 모토로라가 시장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다”라며 “좋은 브랜드를 매개로 고객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기업이 앞으로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