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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정사'…삶이 지루한 남녀 ‘절망의 섹스’에 빠지다

입력 | 2003-10-28 18:09:00

익명성 속에 숨은 채 만나면 다짜고짜 격렬한 섹스를 나누는 중년 남녀의 불륜을 ‘지루하고도 절실한 일상’의 모습으로 그려낸 영화 ‘정사’. 사진제공 프리비전


영화 ‘정사’(Intimacy)에 나타난 섹스는 다르다. 지독하게 일상적이다. 섹스를 기다리는 남자의 손톱 밑에는 중년의 지루한 일상을 상징하듯 까만 때까지 끼어있다. 남자를 찾아온 여자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오줌을 누고 꾸르룩 물을 내린다.

섹스만 할 뿐 이름도 묻지 않기로 약속했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며 복잡미묘해지는 남녀관계를 다룬 영화는 꽤 있다. ‘나인 하프 위크’ ‘포르노 그래픽 어페어’ ‘베터 댄 섹스’ 등.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중년남녀의 섹스는 노골적이되 ‘야하지’ 않다. 콘돔을 끼우거나 오럴섹스를 하는 장면이 가감 없이 드러나도 말이다.(국내 개봉 편에는 이들 장면이 뿌옇게 처리된다.)

바텐더로 혼자 살아가는 이혼남 제이(마크 라일런스)에게는 수요일 오후에 찾아오는 여자(케리 폭스)가 있다. 익명성 속에 숨은 두 사람은 늘 만나자마자 격렬한 섹스를 나눈 뒤 헤어진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제이는 어느 날 귀가하는 여자의 뒤를 밟아 정체를 알아낸다. 여자는 클레어라는 이름을 가진 무명 연극배우이자 가정적인 남편과 한 아이를 둔 평범한 주부. 제이는 클레어의 남편에게 접근해 여자에 대한 얘기를 캐묻고 이를 알게 된 클레어는 혼란에 빠진다.

이 영화가 설득력을 얻는 까닭은 남녀가 서로의 매력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섹스를 음미하지 않는다. 전희도 없고 테크닉도 없다. 섹스 시간은 30초를 넘어가는 법이 없다. 여자의 배는 살이 접히고 피부는 윤기가 없으며 가슴은 늘어졌다. 그러나 삶이 지루해서 섹스는 그만큼 더 절실하다.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것만 마시지만 매번 뭘 마실 건지 물어봐야 좋아해.” 제이의 말마따나 두 남녀는 ‘삶이 늘 똑같지만 그래도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남편에게 발각된 뒤에도 오히려 짜증처럼 삶의 고단함을 남편에게 쏟아내는 클레어의 뜻밖의 모습은 밴드 ‘틴더스틱스(Tindersticks)’의 세기말적이고 무기력한 주제음악과 더불어 이 영화가 ‘불륜의 일상’을 치명적으로 파고들었음을 보여준다.

2001년 베를린영화제 작품상(금곰상) 여우주연상(은곰상) 등 3개 부문 수상작. 31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