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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 업]나는 왜 사소함에 집착하나

입력 | 2003-10-09 16:34:00

사소한 것들이 모여 어느새 자신만의 역사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잊혀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 한다. 옛 '기억'을 파는 가계인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토'. -이종승기자 urisesan@donga.com


매일 오전 7시에 자신의 담배 가게 모퉁이에서 같은 앵글로 같은 장소의 사진을 딱 한 장씩 찍는 사람이 있다. 12년 동안 찍은 사진들은 4000장이 넘었다. 똑같은 사진들로 보이지만 계절이 변하면서 빛의 각도가 다르고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거리의 흐름이 느껴진다.

이는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1990년 단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속 인물 오기 렌의 습관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깨달았다. 렌은 시간을,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찍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세상의 어느 작은 한 모퉁이에 자신을 심고 자신이 선택한, 자신만의 공간을 지킴으로써 그 모퉁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변하는 건조한 이 사회에서 자기 것을 지켜나가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소중한 기록을 통해 잊혀져 가는 자신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삶의 족적

최정기씨가 40여년간 모은 자신의 기록들을 들춰보고 있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한국방송공사(KBS) 근로복지기금 사무국장 최정기씨(52)는 2000년 자신의 50년 삶을 정리하는 책자를 자비로 펴냈다.

470쪽짜리 이 책에는 최씨가 초등학교 때부터 써온 일기와 글모음부터 결혼식에 썼던 신랑과 신부의 명패, 각종 상장과 임명장, 신분증, 편지, 기념품, 수첩 등 자료 수백여 점이 기록돼 있다.

이뿐 아니다. 고향인 경기 광주를 벗어나 최씨가 가본 36개 지역을 방문 날짜와 내용 별로 정리했다. 1979년 결혼 후 이사를 다녔던 17군데 집 주소와 집값, 신체 성장 발달 상황, 초등학교 반 번호부터 시작해 군대, 회사 등에서 받은 각종 번호, 옮겨 다닌 직장, 아내를 만나기 전 선을 봤거나 알고 지냈던 36명의 여인들의 이야기 등도 적었다.

최씨가 경험한 다양한 ‘최초’ 모음도 있다. 이 속에는 7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해 한 집안을 이룬 50대 가장의 삶의 궤적이 드러난다.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대학을 휴학했다 뒤늦게 졸업한 최씨는 동양방송(TBC)에 취직해 첫 출근을 며칠 앞둔 78년 11월 3일 처음으로 양복을 맞췄다. 79년 11월 17일 결혼을 하고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마련한 180만원짜리 전세 아파트가 그의 첫 보금자리였다.

3년 뒤인 82년 11월14일 자기 이름으로 된 첫 집을 강서구 화곡동에 샀다. 주택은행에서 융자 500만원을 받아 1400만원에 산 아파트였다. 그리고 이날 권투선수 김득구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타이틀전을 하다 숨졌다.

그가 자신의 인생 행적을 ‘행복·기쁨’과 ‘불행·슬픔’의 두 지표로 해서 그린 꺾은선 그래프에는 80년 11월 언론통폐합이 최저점에 와있다. 이때 TBC가 KBS로 통합되면서 직장도 분위기도 달라졌다. 유신독재를 겪은 72∼79년과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린 81∼87년에 최씨는 직장합격, 결혼, 득녀, 득남 등 최고점을 만끽했다.

최씨는 “삶의 족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기록을 했다. 내 삶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잊혀지는 것의 아쉬움

이진호씨(34·가명)는 직장 생활 7년차 회사원이다. 5세와 3세 아들이 있다. 이씨는 2년 전부터 매일 자신이 먹은 술의 양과 달린 거리, 금연 여부, 영어공부 양을 정리하고 있다.

“건강과 자기 계발 그리고 가족은 30대 직장인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기록하면서 내 정신상태를 맑게 유지하고 싶었다.”

이씨는 2001년 12월 31일 “연간 200시간 AFNK 받아쓰기를 다짐한다. 이는 주당 평균 4회, 매월 평균 17회의 받아쓰기를 의미한다. 영어원서 10권을 독파하고 독후감 및 단어를 정리해 외울 것이다”고 목표를 세웠다.

1년이 지난 작년 12월 31일 이씨는 한해를 정리하면서 ‘담배는 지난해 8월 25일부터 금연했으니 성공했다. 주당 평균 33.86km, 연간 1795km, 주당 평균 3.41회(연간 181회)를 뛴 것 역시 성실한 결과였다. 하지만 술을 주당 2.9회(연간 153회)나 먹고 주당 1.1회나 폭음한 것은 알코올중독자 수준이었다. 결국 달리기와 금연을 통해 얻은 건강을 술로 갉아먹은 꼴이다’고 자평했다.

2001년에는 그저 ‘폭음(暴飮) 혹은 불음(不飮), 금연(禁煙) 또는 끽연(喫煙), AFNK ○ 혹은 Ⅹ’ 식으로 간단히 정리 되던 기록은 2002년 들어 비망록의 형식을 띠기 시작했다.

“잊혀지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그 기억들을 놓치는 것이 싫었다.”

부부의 맞벌이 때문에 지방 부모님 댁에 맡긴 두 아들과 주말에 어떻게 지냈는지가 또 하나의 소중한 기억으로 기록됐다.

이씨의 지난해 5월 22일 기록은 ‘HC(헬스클럽) 0630, 6.7km (달림)’만이 적혀 있다. 며칠 뒤 이씨는 그 여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렇게 기록되지 않는 것은 잊혀지는구나. 아, 무서운 기록의 힘이여. 내 인생의 한 날이 철저히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록은 인생의 전부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애린교회의 강정보 목사(68)는 1961년 목회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해온 설교 메모를 보관하고 있다. 잦은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진 것도 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강 목사의 삶이 100여 권의 대학노트와 바래진 16절지 묶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로 기록하고 보관할 필요를 느꼈다기보다는 제 생활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제 일생의 전부이자 전 재산입니다.”

그의 설교 기록에는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는 설교는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그의 신념이 담긴 여러 메모들이 적혀 있다.

70년대 중반 유신 치하의 엄혹했던 시절 어느 날 설교 메모에는 ‘목회자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는 한 서구 기독교신학자의 말이 연필로 적혀 있다. 그는 이날 예배가 끝난 뒤 “몸조심하시라”는 신도들의 걱정 어린 말을 들어야 했다.

80년 광주에서의 슬픈 일과 90년대 참혹하고도 어처구니없던 각종 대형 사건, 사고들 그리고 올해 초 대구 지하철방화사건 등의 비극적인 일들은 어김없이 그의 메모에 등장했다.

“부끄럽지만 이 기록들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 내용을 들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는 자신의 ‘미시사(微視史)’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