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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국민의 정부]4부⑤임동원의 독주

입력 | 2003-10-08 18:13:00

햇볕정책은 DJ가 끌고,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미는 양상이었다. DJ가 삼고초려 끝에 임 전 원장을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영입한 직후인 95년 2월 하순 두 사람이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방문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6월 23일 청와대 영빈관 내 한 응접실. 방한 중이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예방하기에 앞서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을 만나고 있었다.

“공화당이 제네바 합의에 따라 매년 50만t씩 북한에 보내고 있는 중유 예산을 절반으로 깎아버렸습니다. 한국 정부가 그 예산의 일부를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한국 정부는 대북 경수로 사업 자금의 70%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추가 예산에 대해선 국회를 설득할 수 없고, 국민 동의도 받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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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올브라이트의 호소도 간절했다.

“김 대통령의 의향을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그 얘기는 더 이상 안 꺼내는 게 좋겠습니다.”

올브라이트는 곧이어 DJ와 1시간35분간 면담했지만 중유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DJ정부에서 임동원의 위상과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그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한국의 대북 및 외교정책에 관한 한 임동원을 통하지 않으면 DJ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당시 미국 행정부 안팎에서 상식처럼 통하던 얘기였다. 심지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워싱턴 조야에선 임동원을 ‘한국의 헨리 키신저’라고 부르기도 했다. 임동원의 외교적 위상이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 버금간다는 뜻이었다.

DJ 정부 5년간 대북정책은 임동원이 가는 부처가 주력이 돼 움직였다. 야당과 언론은 물론 정부 내부에서도 ‘시스템은 없고, 인치(人治)만 있다’고 비판했지만, DJ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그만큼 임동원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DJ와 임동원의 인연은 94년 12월 초 시작됐다.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던 DJ는 마땅한 사무총장 감을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당시 비서실장이던 통합신당 정동채(鄭東采) 의원이 임동원을 추천하자 DJ는 “그런 훌륭한 분이 나에게 오겠느냐”면서도 적극 교섭할 것을 지시했다. 며칠 뒤 정동채는 프라자호텔에서 임동원을 만났다. 하지만 임동원은 건강을 이유로 DJ측의 아태재단 합류 요청을 거부했다. 이북 태생에다 육사(13기) 출신인 임동원으로서는 ‘색깔론’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DJ가 함께 일하기 거북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DJ는 12월 중순 정동채 편에 “당신과 함께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싶다”는 내용의 A4용지 두 장짜리 친서를 보냈다. 이어 1월 초순 정동채를 통해 다시 임동원과 접촉하는 등 말 그대로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임동원의 영입에 성공했다.

임동원은 아태재단으로 첫 출근한 2월 초부터 약 두 달간 DJ의 연설문과 강연문을 모아 놓은 ‘후광(後廣) 전집’(총 15권)을 꼼꼼히 읽으며 DJ를 파악했다. 임동원은 곧 DJ의 동교동 자택이나 인근 호텔에서 통일방안에 대해 밤새워 토론할 정도로 DJ와 가까워졌다.

DJ는 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먼저 임동원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 내정해 놓고 그를 중심으로 외교안보통일팀 장관 인선을 했다. 아태재단에서 3년간 동고동락한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DJ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A씨의 증언.

“조각 때 DJ는 통일부 장관으로 박철언(朴哲彦) 전 자민련 부총재를 생각했지만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가 이에 난색을 표해 인선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때 임동원이 ‘이북 출신의 보수 인사이면서도 남북문제를 잘 아는 강인덕(康仁德)씨가 어떠냐’고 DJ에게 건의했고,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DJ는 98년 국무회의에서 두 세 차례나 “외교안보팀은 걱정이 없다. 난 결재만 하면 된다. 경제팀도 그렇게 (잘) 할 수 없느냐”며 임동원을 공개적으로 치켜세운 일도 했다.

98년 하반기부터 99년 상반기까지 진행된 윌리엄 페리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의 대북정책 조율 협상도 임동원이 도맡았다. 임동원은 8차례나 페리 조정관과 만나 “북한 핵문제를 대증요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성공할 수 없다. 북-미간 ‘상호 위협 감축’이란 근본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미국도 DJ의 대북 포용정책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 당시 정부 내의 평가였다.

그런 만큼 DJ의 임동원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심화됐다. 임동원이 주요 정책을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현안에 관한 의사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져 ‘효율성’은 증대됐지만 그에 못지않게 부작용도 컸다. 특히 공식 외교라인의 소외감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외교통상부 고위직을 지낸 B씨의 증언.

“대북정책에 있어서 임동원은 ‘중요한 1차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이고, 나머지 외교안보통일 장관들은 ‘그 정보를 받아 해석해 주는 사람’에 불과했다. 이러다보니 미국 등 주요 우방국 관계자들은 우리 공식 외교 라인을 제쳐놓고 ‘임동원과 만나겠다’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공식 라인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2000년 3월 DJ의 유럽 순방 때 일이다.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DJ와 장시간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된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금의 단계적 대북 접근 방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며 ‘평화협정 체결’ 같은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를 듣고 있던 DJ는 “이 사람아, 임동원은 당신과 생각이 달라”라며 일축해버렸다.

B씨는 “이정빈은 국가정보원장인 임동원이 대북정책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등에서 이정빈과 임동원이 부딪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정빈은 임동원과 전화로 언쟁을 벌이다 “국정원장이면 그에 맞는 일을 하라는 취지로 ‘You mind your own business(당신 일이나 신경 써)’라고 쏘아붙인 일도 있다”고 B씨는 전했다.

그러나 양자 갈등의 결과는 언제나 이정빈의 패배였다. 이정빈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가 출범한 후 한미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2001년 2월 7일 워싱턴을 방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만나고 10일 귀국했다. 바로 다음날인 11일 국정원장인 임동원이 방미길에 올랐다. 이정빈은 이를 알고 DJ에게 “정보기관장이 외교부 장관의 공식 파트너인 파월 장관을 만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임동원은 미국에서 파월 장관을 비롯해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핵심 인사를 모두 만났다.

이때를 전후해 임동원이 외교 안보 정책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며 월권하고 있다는 비판이 권력 바깥에서도 본격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1년 2월 16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임동원의 방미를 두고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대북 접촉에 이어 외교 교섭까지 나서는 것은 대외관계에 혼선을 부르고, 정보기관의 정체성에도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해 3월 개각으로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야당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한나라당은 2001년 8·15 평양 통일축전 참가자들의 일부 친북(親北) 행동을 둘러싸고 파문이 일자 임동원에 대해 해임 건의안을 냈고 자민련의 ‘협조’를 얻어 9월 3일 이를 가결시켰다.

해임안 가결에 앞서 임동원은 DJ에게 두 차례나 사의를 표명했지만 DJ는 “이 문제는 자민련과 민주당간의 정치적 문제 때문이니 당신은 가만히 있으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당시 DJ는 JP가 임동원 해임을 촉구한 것은 여당의 대선 후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권력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DJ는 마지못해 임동원을 장관직에서 해임하긴 했지만 ‘오기 인사의 전형’ ‘의회민주주의의 부정’이란 여론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9월 11일 임동원을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임명해 다시 곁에 뒀다. 이 때문에 DJ가 내치는 박지원(朴智元)에게, 외정은 임동원에게 중독됐다는 평가가 청와대 안팎에서 나왔다.

노무현 정부의 고위 관계자 C씨는 “DJ 정부에서 ‘임동원 인치(人治)’에 따른 공식 외교라인의 무기력화가 노무현 정부에는 반면교사가 됐다”고 지적했다.

▼박지원, 林해임 이튿날 전화…“서울서 대기하시오”▼

국회 본회의에서 해임건의안이 가결돼 2001년 9월 7일 통일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임동원은 다음날 강원도로 가는 길에 박지원(朴智元) 당시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디 계십니까.”

“쉬러 갑니다. 대통령께 두세 달 해외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온다고 보고해주십시오.”

“쓸데없는 말씀 마시고 무조건 서울에서 대기하십시오.”

청와대는 이 직후인 9월 11일 임동원을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장관급)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DJ정부 5년 동안 임동원이 공직을 떠났던 기간은 9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4일간이 전부다. DJ는 재임기간 그를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핵심 요직에 두루 앉혔다.

임동원은 98년 2월 DJ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차관급)을 맡았다. 임동원이 90년대 초반 이미 통일원(현 통일부) 차관을 지냈고, 나이도 웬만한 장관보다 많은 64세였던 만큼 DJ는 상당히 미안해 했다. 그러나 임동원이 먼저 “난 일이 중요하지 직급엔 관심 없다”고 말했고, 이에 DJ는 무척 고마워했다고 한다.

99년 5월 24일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전임 강인덕 장관이 ‘옷 로비 의혹 사건’에 연루된 데 따른 후속 인사이기도 했지만 “한미간 대북정책 조율은 이제 마무리됐으니 앞으론 남북간 물꼬가 터져야 한다”는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는 후문이다.

99년 12월 23일 오전 DJ는 임동원을 청와대로 급히 호출했다. 대선자금 발언으로 말썽을 빚은 천용택(千容宅) 국정원장의 후임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임동원은 “나는 신문 정치면도 안 볼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며 완강히 거절했지만 DJ는 “그러니까 당신이 맡아야 한다. 국정원은 원래 정치에 관여하지 못한다”며 강권했다.

그러나 DJ가 ‘임동원 국정원장’이라는 카드를 꺼낸 이면에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성사’라는 포석이 깔려 있었다. 이때 이미 남북간 비밀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논의가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