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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현대 꿔뚫는 동양지성

입력 | 2003-10-03 17:43:00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전 6권)/천광싱(陳光興) 외 지음 백지운 외 옮김/각권 210~310쪽 각권 1만원 창비

동아시아의 중추 국가를 지향한다면서도 여전히 미국과 유럽의 정치 경제적 동향에 더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동아시아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이야기하면서도 뉴욕과 파리의 유행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지적(知的)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나 문명충돌론자인 새뮤얼 헌팅턴 같은 서구 지식인들은 수없이 인용해도, 서구와 다른 중국적 근대성을 모색하는 왕후이(汪暉)나 ‘아시아의 부재’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는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같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무시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지적 풍토다.

‘창작과비평사’가 ‘창비’로 이름을 바꾼 후 첫 작품으로 내놓은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6권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서구로 향한 한국인들의 눈을 조금이나마 자신들이 속한 동아시아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연세대 백영서(중국사학) 임성모(일본사학), 일본 히토쓰바시대 이연숙(사회언어학), 서강대 이욱연 교수(중문학) 등 4명의 기획위원은 서구의 관점이 아니라 동아시아인의 눈으로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지적 작업을 계속해 온 지식인들의 입장과 이론을 소개하기로 하고 6명의 동아시아 지식인을 선정했다. 뽑힌 인물은 대만의 천광싱(陳光興), 중국의 쑨거(孫歌), 추이즈위안(崔之元), 왕후이, 일본의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와 야마무로 신이치.

선정 대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비판적 지식인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근대의 보편적 국민국가 질서가 냉전체제와 결합되는 현실을 겪으며 성장했다. “(자국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면서 동아시아의 보편적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지식인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이 기획 의도.

천광싱은 ‘제국의 눈’에서 탈식민, 탈냉전과 함께 미국 주도의 패권에 반대하는 ‘탈제국’이 동아시아인에게 아직도 유효한 과제라는 주장을 제시하고, 쑨거는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에서 국민국가를 강조하거나 간단히 부정하는 관점을 모두 비판하며 동아시아 단위의 사유를 시도한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기획위원인 임성모, 이욱연, 백영서, 이연숙 교수(왼쪽부터). 사진제공 창비

추이즈위안은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서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 바뀌어가는 중국을 반성하며 사회주의 경험의 장점을 살린 제3의 길을 주장하고, 왕후이는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에서 독자적 근대성을 추구하던 중국이 덩샤오핑 이후 서구적 근대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고 비판한다.

사카이 나오키는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에서 자기완결적이고 균질적인 공동성은 모두 타자를 배제하는 폭력성에 의해 관철된다며 일본의 국민주의와 서양의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야마무로 신이치는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에서 동아시아의 사상적 연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며 동아시아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역사적 공간으로 파악한다.

6명 각자가 주인공이 된 6권의 책은 지적 편력에 대한 자전적 기록, 자기 사상의 정수를 보여줄 만한 글들의 모음, 한국 지식인과의 대담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한 권의 책으로 동아시아의 지식인이 이룩해 온 이론적 성과와 그 지적 사회적 배경을 효율적으로 정리해 내려는 기획자들의 배려가 돋보인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